스위스 식품 대기업 네슬레(Nestlé)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자라(Zara)의 모기업 인디텍스(Inditex)를 글로벌 패션 리더로 성장시킨 주역 파블로 이슬라(Pablo Isla·61)가 10월 1일부로 네슬레 이사회 의장에 선임되면서다. 그는 25년 만에 회사 외부에서 영입된 첫 의장으로, 물류·e커머스·소비자 트렌드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2025년 9월 18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네슬레는 당초 예정됐던 일정보다 반 년 앞당겨 이슬라 의장 체제를 출범시킨다. 이로써 2016년부터 의장을 맡아 온 폴 벌케(Paul Bulcke)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커피·초콜릿·생수 등 다양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가진 네슬레는 대대적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드레스와 청바지에서 커피와 킷캣(KitKat)으로의 전환은 얼핏 보기엔 연결 고리가 약해 보인다. 그러나 ‘빠른 제품 출시(speed to market)’와 ‘젊은 소비자 공략’, ‘디지털 채널 융합’을 통해 자라를 빠른 패션 아이콘으로 변모시킨 경험은, 성장 둔화를 겪는 네슬레에도 유효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네슬레 내부 소식통은 “이슬라 의장은 네스프레소(Nespresso)의 디지털 운영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1. 인디텍스에서 검증된 실적
이슬라는 2005년 인디텍스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뒤 2021년까지 매출을 67억 유로에서 277억 유로(약 32조 7,400억 원)로 끌어올리며 주가를 8배 이상 상승시켰다.*1유로=약 1,350원 가정 그는 물류 혁신과 온라인·오프라인 연계(O2O)로 패션업계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네슬레 주가는 최근 3년간 33% 하락했다. 같은 기간 영국 유니레버(Unilever)가 15% 상승, 프랑스 다논(Danone)이 52% 상승한 것과 대조된다. 투자자들이 ‘외부 피가 필요하다’고 외친 배경이다.
2. e커머스·공급망 혁신
이슬라가 자라에서 도입한 핵심 기술은 RFID(무선주파수 식별) 태그다. 모든 의류에 소형 칩을 부착해 실시간 재고·판매 데이터를 확보함으로써, 매장·온라인 주문을 48시간 내 처리하는 초고속 공급망을 구축했다.
“이슬라는 디지털과 매장을 통합해 ‘매장은 곧 물류허브’라는 개념을 정착시켰다. 이러한 모델은 식품·음료 시장에서도 유효할 것” — 네슬레 관계자
네슬레 역시 최근 5년간 온라인 판매 비중을 두 배 이상 확대해 전체 매출의 20.2%를 e커머스에서 올리고 있다. 이는 주요 경쟁사 대비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네슬레는 “AI를 활용해 공급망·영업·생산 전반을 최적화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3. 리더십 전환과 ‘투톱 체제’
이달 초 취임한 새 CEO 필립 나브라틸(Philipp Navratil·전 네스프레소 수장)은 “속도와 창의성을 갖춘 조직으로 탈바꿈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슬라 의장–나브라틸 CEO 투톱 체제에 대해 IESE경영대학원 기도 슈타인(Guido Stein) 교수는 “이슬라는 친화적이면서도 요구 수준이 높은 리더로, 사내 인재가 성장할 공간을 남겨 둔다”며 ‘실행력 있는 의장’ 역할을 전망했다.
실제 이슬라는 인디텍스 내에서 창업주 아만시오 오르테가(Amancio Ortega)로부터 2011년 회장직을 물려받은 뒤, 2022년에는 그의 딸 마르타 오르테가(Marta Ortega)에게 자연스럽게 권한을 위임하는 등 ‘부드러운 승계’를 이끈 경력이 있다.
4. 구조조정 가능성 & 전문적 통찰
시장 안팎에서는 저성장·저수익 브랜드를 과감히 정리하는 ‘카탈로그 다이어트’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아동용 과자, 저수익 생수 브랜드 등 비핵심 사업부 매각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는 이슬라가 자라 이외 8개 브랜드(마시모두띠, 버쉬카 등)를 균형 있게 성장시킨 경험을 토대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실행할 것이란 기대를 반영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프리미엄 커피·건강식품·펫푸드 부문을 성장 엔진으로 지목한다. 나브라틸 CEO가 네스프레소에서 검증한 커피 비즈니스 역량과, 이슬라 의장의 글로벌 소매·디지털 감각이 맞물려 ‘고부가가치 카테고리 확대’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분석이다.
5. 낯선 용어 풀이
RFID란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의 약자로, 전파를 이용해 태그 정보를 무선으로 읽어 들이는 기술을 뜻한다. 바코드보다 인식 범위가 넓고, 다량의 물품 정보를 일괄 수집할 수 있어 재고 관리·물류 가시성을 혁신하는 핵심 도구로 통한다.
O2O(Online to Offline)는 온라인에서 취합한 주문을 오프라인 매장(또는 창고)에서 실시간 처리하는 유통 모델로, 소비자가 ‘언제 어디서나’ 상품을 구매·수령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6. 향후 전망
투자은행들은 향후 12개월간 네슬레가 EPS(주당순이익) 성장률을 한 자릿수 중반에서 두 자릿수 초반으로 복귀시킬 경우 주가 반등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주주환원 정책에서 자사주 매입 확대, 배당 성향 상향 등이 병행될지 여부가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또한 인플레이션 환경 속에서 원가 절감과 가격 전가를 어떻게 균형 잡을지가 이슬라·나브라틸 체제의 첫 ‘중대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섣부른 가격 인상은 수요 위축을 초래할 수 있지만, 공급망 효율화·제품 믹스 개선이 병행된다면 이익률 제고 여지가 있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이러한 과제를 감안할 때, ‘패션계의 디지털 혁신가’로 불리는 이슬라 의장의 합류는 단순한 인사 이동을 넘어 스위스 식품 공룡의 체질 개선을 가늠할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1 = 0.8461 유로, 기사 내 환율은 표기 시점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