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러시아산 석유를 대량 구매하고 있는 인도와 중국산 제품에 대해 최대 100%의 관세를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목적으로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추가 조치다.
2025년 9월 10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는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초로 보도한 뒤 CNBC의 메건 카셀라 기자가 두 명의 소식통을 통해 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미·EU 고위급 회의에 호출돼 이 사안을 직접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회의에 정통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 행정부는 EU가 중국·인도산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경우 동일한 수준의 ‘미러(mirror) 관세’를 적용하겠다는 의사를 함께 전달했다.
미국·EU의 기존 관세 조치 현황
미국은 이미 인도산 제품에 25%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다른 관세와 합산하면 총 관세율이 최대 50%에 달한다. 뉴델리 정부는 이를 두고 “부당하고 불공정하며 비합리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인도 측은 미국과 EU 역시 러시아와 활발한 교역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EU 집행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4년 EU·러시아 양자 상품 교역액은 675억 유로(약 781억 달러)였고, 2023년 서비스 교역액은 172억 유로였다.
“EU 내부에서도 ‘러시아산 에너지·원자재 의존도’를 완전히 끊지 못한 상황에서 인도·중국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인도·중국의 러시아 원유 구매 규모
러시아 모스크바 주재 인도대사관 통계에 따르면, 인도와 러시아의 교역 규모는 2025会계연도 기준 687억 달러로 팬데믹 이전(101억 달러)의 5.8배로 급증했다.
한편 중국은 세계 최대의 러시아산 원유 구매국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자국 제품에 대한 새로운 관세를 30% 선에서 동결시키는 ‘휴전’에 성공했지만, 이번 트럼프 제안이 관철될 경우 추가 관세 가능성이 재점화될 수 있다.
푸틴-젤렌스키 회담 ‘데드라인’ 무산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할 것을 요구하며 기한을 제시했지만, 해당 기한이 지났음에도 평화협상 일정은 오리무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알래스카에서 푸틴 대통령과 직접 만난 바 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결속을 강화했다. *상하이협력기구(SCO)는 중국·러시아 주도로 출범한 안보·경제 협력체로, 중앙아시아 주요국이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트럼프, 인·중과의 통상 협상 재개 강조
트럼프 대통령은 현지 시각 9월 9일 밤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미국과 인도는 무역장벽 해소를 위해 협상을 재개했다”며 “모디 총리는 ‘아주 좋은 친구’이므로 원만한 타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중국과의 협상은 8월 말 리청강(李成刚) 중국 상무부 차관보의 워싱턴 방문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중 간 구조적 갈등, 특히 기술·안보 이슈가 관세 협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전문 용어 해설
관세(Tariff)란 정부가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이다. 보호무역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상대국에 대한 압박 또는 자국 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활용된다.
미러 관세(Mirror Tariff)는 동맹국이 특정 국가에 부과한 관세율과 동일한 수준의 관세를 함께 적용하는 조치다. 이를 통해 국제 공조를 강화하고, 대상국의 회피 수단을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다.
세컨더리 제재(Secondary Sanctions)는 제재 대상국과 거래하는 제3국·제3자까지 제재하는 조치다. 이번 트럼프 제안은 사실상 세컨더리 관세 조치로 평가된다.
기자 분석 및 전망
이번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2024년 대선 이후 미국 내 보호무역 기조 강화와 제조업 육성이라는 국내 정치적 요인도 배경에 깔려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2기 들어 미국은 동맹국에 더 많은 안보·경제 비용 분담을 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EU가 이를 수용할지 여부는 대서양동맹의 결속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시장 측면에서는 관세 확대가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공급망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원자재·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관세 충격이 겹치면, 제조업·소비재 전반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재차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향후 주목할 변수는 첫째, EU 내부의 회원국별 이해관계다. 독일·이탈리아 등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과 북부·동부 유럽의 대러 강경파 간 입장 차이가 뚜렷하다. 둘째, 미국 의회 승인 절차다. 의회가 관세 조치를 승인해야 하므로 2026년 중간선거와 맞물려 정치적 논쟁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