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처방의약품에 대해 과도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지적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는 30일(현지시간) 제약사 화이자(Pfizer)가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 메디케이드(Medicaid)에 공급하는 의약품 가격을 인하하고, 신규 출시 의약품의 미국 내 가격이 다른 고소득 국가보다 높지 않도록 하겠다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제약사들도 뒤따르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2025년 9월 30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이번 합의는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해 온 ‘의약품 가격 공정화’ 의제의 상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업계는 이 조치가 실제 소비자 가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하고 있다.
■ “TrumpRx” 웹사이트 신설
내년 초 미국 정부는 TrumpRx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해 소비자가 원하는 의약품을 직접 제조사로부터 구입할 수 있는지를 검색하도록 할 계획이다. 현재 미국 내 대부분의 직접구매(Direct-to-Consumer) 플랫폼은 보험이 없는 환자에게 1 자비 부담(out-of-pocket)으로 판매하는 구조여서, 보험처방 시 부담하게 될 고정 약값(co-pay)보다 비용이 높게 책정되는 경우가 많다. 보험이 없거나 취약 계층인 환자를 위해 제약사가 무료·저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스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 메디케이드 대상 추가 인하
화이자는 연방·주 정부가 공동 운영하는 저소득층 건강보험 메디케이드에 포함된 대다수 치료제의 가격을 추가 인하하기로 약속했다. 구체적인 시점과 할인율은 공개되지 않았다. 법률상 제약사는 이미 메디케이드에 가장 낮은 시장가격 대비 상당한 할인을 제공해야 한다.
메디케이드는 미국 의약품 지출의 약 10%를 차지하며, 현행 제도상 제약사가 메디케이드에 제공하는 할인폭은 상업보험보다 크다.
다만, 이번 가격 인하가 민간 상업보험이나 노인·장애인을 위한 메디케어(Medicare) 등 다른 보험 채널에 연동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 ‘최혜국’ 가격 모델 도입
화이자는 고소득국가와 동일한 출시가격으로 미국에 신약을 공급하겠다고 서약했다. 학계 연구 결과, 미국은 브랜드 의약품 가격이 다른 선진국 대비 평균 3배 이상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 분석에 따르면 2024년 미국에서 신약 출시 초기 공시가는 평균 37만 달러로, 2021년(18만 달러) 대비 두 배 이상 상승했다. 희귀질환 치료제처럼 과학적 진보를 앞세운 파이프라인이 늘어나면서 제약사가 더 높은 초기 가격을 책정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화이자뿐 아니라 일부 다국적 제약사도 비슷한 가격조정을 예고했다. 예컨대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ristol Myers)는 조현병 치료제 코벤파이(Cobenfy)를 2026년 영국에 도입할 때 미국 출고가와 동일한 수준을 책정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제약사가 각 정부·보험사와 맺는 비공개 후행할인(back‐end rebate)이 존재할 경우, 표면적 가격이 실제 납품가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문이 제기된다.
■ 해외 가격 인상 압박
트럼프 행정부는 “타국 정부도 더 많은 약가를 부담해야 제약사가 R&D 재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럽연합(EU) 등은 자국 재정 안정을 이유로 미국식 인상 요구에 난색을 표해 왔다. 업계 관계자들은 “미국 정부가 외교적 지렛대를 통해 실제로 다른 국가의 약가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
■ 화이자의 ‘국내 제조 확대’ 약속과 관세 유예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1일부터 제약사가 미국 내 생산시설을 증설하지 않을 경우, 브랜드·특허 의약품 수입분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화이자는 현재 미국으로 들여오는 의약품 가치 100%를 국내 생산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정부는 향후 3년간 화이자 제품에 대해 ‘제약 전용 관세’를 면제한다. 업계는 해당 ‘유예기간(grace period)’이 국내 투자 확대를 실제로 견인할지 주시하고 있다.
■ 용어 설명
메디케이드(Medicaid)는 저소득층·장애인·노인 등을 대상으로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재원을 투입해 운영하는 공공 의료보험이다. 가입자는 소득·가구 규모에 따라 무상 또는 저액의 보험료로 진료·약품 서비스를 받는다.
최혜국(Most-Favored Nation·MFN) 가격은 자유무역 협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특정 국가에 제공한 최저 가격을 모든 거래국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원칙이다. 이번 합의에선 ‘미국이 타 고소득국가보다 비싸게 신약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변용됐다.
■ 전문가 시각
의료경제학자들은 이번 조치가 “단기적으로는 제한적 효과”를 보이더라도, 제약사 간 출시가 상한선을 둘러싼 가격경쟁을 촉발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러나 보험사·약국혜택관리업체(PBM) 등 복잡한 미국 유통구조를 고려할 때, 실제 환자 부담이 빠르게 줄어들지는 불투명하다.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거쳐 시장에 진입한 후에도 제약사는 보험·정부기관과 별도 가격 협상 및 리베이트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정책 효과를 평가하려면 최소 1~2년의 데이터 축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향후 과제
첫째, TrumpRx 플랫폼이 메디케이드·메디케어·민간보험과 어떻게 연동될지가 관건이다. 둘째, 다른 글로벌 제약사가 화이자와 유사한 전향적 가격정책을 채택할지 여부다. 셋째, 관세 유예기간이 끝난 뒤에도 국내 생산 확대가 유지될지—또는 해외생산 재이전을 시도할지—지속적 감시가 필요하다.
이번 합의가 실제 약가 절감으로 이어진다면 미국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 완화와 글로벌 의약품 가격체계 변화라는 ‘투트랙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해외 가격 인상을 동반할 경우 다른 국가의 의료재정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어 국제 협의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