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발(Reuters)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해외 약가(藥價) 인상→국내 약가 인하’라는 새로운 해법을 추진하기 위해 다국적 제약사들과 비공개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백악관 관계자와 제약업계 소식통 3명에 따르면, 행정부는 제약사들의 해외 정부(특히 유럽)와의 가격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지렛대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 내 약가를 ‘가장 우대국(most-favored nation·MFN)’ 수준으로 낮추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2025년 8월 7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은 현재 진행 중인 양자 무역협상과 관세(관세율 설정) 권한을 활용해 ‘해외 약가 인상 압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 같은 전략은 1)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 내 약값을 해외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내리되, 연구·개발(R&D) 투자를 위축시키지 않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기됐다.
국내·외 가격 격차 미국은 처방의약품 가격이 타 선진국 대비 최대 3배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이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공개 비판해 왔으며, 이런 격차를 줄이는 것이 핵심 공약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반면 유럽은 국가 단위로 가격을 협상·규제해 상대적으로 낮은 약가를 유지해 왔다.
“백악관과 업계가 서로 조언을 구하며 협력적 분위기 속에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라고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말했다. 그는 MFN 가격제 도입이 국제무역 규범 안에서 추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우대국(MFN) 약가’란?
국제 무역·통상에서 사용되는 MFN 원칙을 약가에 적용하면, 미국은 외국 정부가 확보한 가장 낮은 수준의 약가를 자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받겠다는 의미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통해 해외와의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구상이다.
제약업계 반응과 우려 글로벌 제약사들은 “미국 시장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R&D 재원 확보의 핵심”이라는 논리를 들어 왔다. 미국약품연구제조사협회(PhRMA)는 공개 논평을 거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R&D 위축을 피하면서도 국내 약가 인하 압박을 피해 갈 수 있다면 해외 가격 인상도 검토할 수 있다”는 기류가 감지된다.
그러나 애너 캘턴벡(Verdant Research 보건경제학자)는 “미국 시장에서만으로도 전 세계 R&D 투자를 충당할 수 있다는 연구가 이미 존재한다”며, 해외 가격 인상이 필수적이라는 제약업계 주장을 반박했다.
백악관–제약사 비공개 회의
두 명의 제약사 고위 임원에 따르면, 지난 수개월 동안 백악관은 업계에 ‘해외 약가 인상 아이디어’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한 유럽계 대형 제약사 임원은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백악관)를 비롯한 모든 채널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받고 있다”며, 이미 일부 유럽 정부와 실무 접촉에 착수했음을 인정했다.
통상 지렛대 행정부는 영국·유럽연합(EU)과의 무역협상을 지렛대로 삼아, ➊ 국가별 GDP 대비 신약 지출 비율 확대, ➋ 관세 인하 대가로 약가 인상 등을 제안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의약품 관세가 부과될 경우 15% 상한에 합의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17개 제약사 CEO에게 보낸 서한에서 “산업계가 제출한 대안은 책임 전가이거나 막대한 재정 지원 요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유럽 각국의 입장
유럽 정부들은 자국 의료재정 안정성과 시민 접근성을 중시해 ‘높은 약가 수용’에 소극적이다. 캘턴벡 연구원은 “가격 통제권을 쥔 국가가 역방향(가격 인상)으로 움직이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영국 사례 영국 정부 대변인은 “미·영 양국 및 국내 제약업계와 긴밀히 협력해 약가 변화의 영향을 분석하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 협상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업계 공동서한 올해 4월 아스트라제네카·바이엘·노보노르디스크 등 30여 개 제약사 CEO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EU가 약가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이는 백악관 요구와 궤를 같이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 시각과 향후 전망
① 국가 간 가격 차이는 결국 환자 접근성·보험재정·혁신 인센티브라는 세 갈래 변수의 균형 문제다. 협상이 해외 약가 인상으로 귀결될 경우, 유럽 내 환자들의 접근성 저하와 신약 승인 지연이 우려된다.
② 무역·통상과 보건의료 정책이 교차하는 전례 없는 시도다. 만약 미국이 통상 압력을 실제로 행사한다면, 의약품이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상 ‘필수재’ 지위를 이유로 분쟁대상이 될 소지도 남아 있다.
③ 미국 내 정치 일정도 변수다. 2024년 대선 이후에도 동일 기조가 유지될지는 불확실하다. 현 정책이 장기화되려면 의회 차원의 초당적 입법이 필요하지만, 가격 규제 vs. 혁신 인센티브 논쟁이 첨예해 합의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결국, 미국이 목표하는 광범위한 약가 인하는 해외 정부·제약사·무역 파트너·국내 유권자 등 다층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문제로, 단기간에 해법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행정부의 통상 카드가 유럽의 약가 정책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는 글로벌 제약·건강관리 시장에 중장기적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용어 설명
1) Most Favored Nation Pricing(MFN) : 무역에서 특정 국가에 최혜국 대우를 적용해 가장 낮은 관세율이나 규제를 제공하는 원칙. 이를 약가에 적용하면, 미국이 자국 소비자에게 해외 최저가를 보장받겠다는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