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수장인 브렌던 카(Brendan Carr) 위원장이 방송·미디어 기업을 상대로 전례 없이 강경한 압박 기조를 이어가며 언론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기 막바지에 임명된 카 위원장은 특정 프로그램 편성 변경을 촉구하거나 합병 심사권을 지렛대로 활용해 기업 정책 수정까지 관철시키고 있다.
2025년 9월 19일(현지시간), 인베스팅닷컴이 로이터통신 기사를 재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카 위원장은 월트디즈니 산하 ABC 방송이 심야 토크쇼 진행자 지미 키멜(Jimmy Kimmel)의 프로그램을 중단하거나 편성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카 위원장은 “우리가 쉽게 갈 수도, 어렵게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회사 측의 자진 시정을 압박했으며, 이는 민주당 의원과 언론·시민단체로부터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카 위원장의 이런 행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취임 8개월 만에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며 다수 방송사에 서한을 보내거나, 합병 승인 과정에서 ‘공익(public interest)’ 조항을 근거로 콘텐츠 편향 시정을 조건부로 내걸었다. 대표적 사례가 2024년 7월 승인된 CBS 모회사 파라마운트글로벌(Paramount Global)과 스카이댄스미디어(Skydance Media)의 84억 달러 규모 인수합병이다. 카 위원장은 “새 경영진이 편향성을 없애겠다는 구체적 계획을 제시했기 때문에 승인했다”고 밝혔다.
정치권 반응은 첨예하다. 하킴 제프리스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와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카 위원장은 직권을 남용했다”며 사퇴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카 위원장은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민주당 출신 FCC 커미셔너인 안나 고메스(Anna Gomez) 역시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FCC는 정부가 불편해하는 발언을 검열할 권한이 없다”며 “공익 기준을 정치적 검열 도구로 비틀고 있다”고 비판했다.
■ ‘공익’·‘동등시간 규칙’이란?
FCC의 공익(public interest) 의무는 지상파·라디오 주파수처럼 ‘공공 자원’을 사용하는 방송사에게 지역사회 문제를 반영하고 다양한 의견을 제공할 책무를 부여한다. 다만 역사적으로 FCC는 1960~70년대 정치적 검열 위험성을 이유로 구체적 편성 간섭을 자제해 왔다. 또 동등시간 규칙(Equal Time Rule)은 지상파 방송사가 선거 후보 한쪽에 시간을 제공했을 때 경쟁 후보에게도 동등 기회를 보장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토크쇼·뉴스해설 프로그램은 ‘예외’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카 위원장이 ABC ‘더 뷰(The View)’에 동등시간 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은 학계와 법조계에서 “확장 해석”이라는 지적을 낳고 있다.
브렌던 카 위원장은 “국민은 기존 대형 언론사가 정확하고 공정하게 보도한다고 더는 믿지 않는다. 변화를 꾀할 때”라고 7월 성명에서 밝혔다. 그는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 관련 보도를 예로 들며 “편향 보도가 만연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옹호단체와 일부 보수 논객조차 그의 접근법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공익 법률단체 Poynter Institute 연구원들은 “NBC·CBS·ABC 등 기성 방송사를 상대로 면허 취소 위협을 반복하는 것은 ‘닉슨 시대 워터게이트’ 때 시도됐던 정치 개입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70년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취재를 문제 삼아 FCC 면허 갱신을 저지하려 했다는 백악관 녹음파일이 공개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에도 ‘부정적 보도를 일삼는 방송사의 면허를 박탈할 수도 있다’며 카 위원장에게 공을 넘겼다.”
FCC 홈페이지는 오히려 “공익은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함으로써 달성된다”고 명시한다. 이 간극이 향후 사법부나 의회를 통해 어떻게 해석될지가 업계 최대 관심사다.
■ 시장 및 투자자 영향
미디어·통신 분야의 M&A 딜에서는 FCC 심사가 필수적이다. 업계 컨설팅업체 PwC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변수’가 규제 심사 시간과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거래 비용과 리스크 프리미엄이 상승한다. 실제로 CBS–스카이댄스 합병은 편향 시정·옴부즈맨 임명·다양성 프로그램 종료 등 추가 조건으로 인해 당초 예상보다 3개월 늦게 승인됐다. 이는 콘텐츠 제작·유통 전반에 투입되는 자본 계획을 지연시켜 주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
월가 애널리스트들은 “카 위원장이 주파수 경매, 5G 인프라 투자 같은 핵심 통신 정책보다 ‘콘텐츠 편향’ 쟁점에 업무 역량을 집중하면, 장기적으로는 미국 미디어·통신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또 글로벌 투자자 관점에서도 “정책 예측 가능성”이 저하되면, 미디어 부문 기업가치 할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 법적 쟁점과 전망
전문가들은 카 위원장의 시도가 제1수정헌법(First Amendment)과 충돌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미 연방대법원은 방송 면허 갱신에서 ‘공익성’을 고려할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개별 프로그램이나 특정 발언을 이유로 면허를 취소한 전례는 극히 드물다. 만약 방송사나 시민단체가 소송을 제기할 경우, ‘행정권 남용’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한편 공화당 내부에서는 “민주당 정부 시절 빅테크 플랫폼이 보수 성향 계정을 검열했다”고 주장하며, 카 위원장의 강경 노선이 ‘균형 맞추기’라고 옹호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하지만 일부 중도 성향 공화당 의원은 “주주가치 훼손”과 “시장 간섭”을 우려하며 신중론을 펼치고 있다.
■ 기자의 시각
브렌던 카 위원장이 내세우는 ‘공익’은 표면적으로는 합리적 근거를 갖춘 듯 보인다. 지상파 주파수가 한정된 공공 자원이라는 점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 규제를 통해 공정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공익의 범위와 해석 주체가 정치권력과 지나치게 밀접해질 때, 언론 자율성은 쉽게 훼손될 수 있다. 특히 미국처럼 다원적 미디어 환경이 확보된 국가에서 ‘콘텐츠 편향’ 시정을 위해 면허 박탈까지 거론하는 것은 과도한 조치로 읽힌다.
또한, 방송사들이 면허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자발적 ‘자기검열’을 강화할 경우, 이는 시청자의 정보 선택권까지 축소시킬 여지가 있다. 결국 규제기관이 ‘공익’이라는 칼을 어떻게 휘두르느냐가 민주주의 체질과 시장 효율성 모두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향후 미국 의회가 FCC 권한 범위를 명확히 재정의하거나, 연방대법원이 판례를 통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방송 면허 시스템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질 경우, 한국을 포함한 해외 방송·통신 정책에도 파급 효과가 미칠 수 있어 국내 기업과 정책당국 역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