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산타클라라】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인텔(Intel) 최고경영자(CEO) 립부 탄(Lip-Bu Tan)의 중국 기업 투자 이력을 문제 삼아 공개적으로 사퇴를 촉구하면서, 탄 CEO가 추진하던 대대적 경영 정상화 작업에 혼선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025년 8월 8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날 성명을 통해 “탄 CEO는 중국과의 이해충돌이 심각하다”며 사퇴를 요구했다. 로이터는 지난 4월 탄 CEO가 중국 군(軍) 관련 회사를 포함해 수백 개 중국 기업에 투자했다는 단독 보도를 낸 바 있다.
투자사 가벨리 펀드(Gabelli Funds)의 애널리스트 마키노 류타(Ryuta Makino)는 “CEO의 거취 논란은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밖에 없다”며 “트럼프가 인텔에 추가 투자를 강제할 경우, 애플·엔비디아와 같은 대규모 지출 능력을 인텔이 당장 갖추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트럼프의 ‘美 제조업 부활’ 구상과 충돌
애플과 AI 칩 선두주자 엔비디아(Nvidia)는 미국 내 제조시설 확충에 수천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약속했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를 고용 창출의 모범사례로 내세우고 있다.
한편, 인텔은 2022년 제정된 ‘칩·과학법(CHIPS Act)’의 최대 수혜주 가운데 하나로 꼽혔으나, 탄 CEO는 부임 이후 오하이오 신규 공장 등 일부 프로젝트를 연기·축소하는 등 ‘선(先)수요, 후(後)투자’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트럼프의 ‘선제 투자’ 요구와 정면으로 엇갈리는 대목이다.
인텔은 8일 성명을 통해 “회사는 미국 우선(America First) 방침에 부합하는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트럼프의 사퇴 요구에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프터스 캐피털 어드바이저스(Aptus Capital Advisors)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데이비드 와그너는 “리더십을 지키겠다면 전면 방어에 나서야 하고, 교체를 검토한다면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며 “수개월간 논쟁이 지속되는 것은 인텔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제 고향입니다. 지난 40년간 이 나라에서 기회를 얻었고, 인텔을 사랑합니다.” – 립부 탄 CEO
탄 CEO는 같은 날 별도 성명을 통해 “이사회가 추진 중인 기업 전환 작업을 전폭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실적 추락’ 속 단행된 세 번째 CEO 교체
탄 CEO는 6개월 전, 잇단 사업 실패와 적자 확대로 경질된 팻 겔싱어(Pat Gelsinger) 후임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인텔 주가는 올해 들어 횡보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약 65% 폭락을 기록했다.
그는 과거 설계 자동화(EDA) 소프트웨어 기업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즈(Cadence Design)를 2008년부터 2021년 12월까지 이끌었다. 로이터는 지난달 케이던스가 중국 군대 핵실험 시뮬레이션에 관여한 대학에 소프트웨어를 판매한 혐의로 1억 4,000만 달러의 벌금 및 유죄합의를 받아들였다고 보도했다.
톰 코튼 미 상원의원(공화)은 7일 인텔 이사회 의장에게 탄 CEO의 중국 투자 및 케이던스의 형사 사건과 관련해 질의서를 발송했다. 이에 탄 CEO는 “법적·윤리적 기준을 지켜왔다”며 “나의 평판은 신뢰 위에 세워졌다”고 반박했다.
美 재무부 ‘중국 군산복합체 기업 리스트’란?
현재 미국인은 재무부가 지정한 ‘중국 군산복합체 기업 목록(CMIC List)’에 오른 회사에 대해서만 투자가 금지돼 있다. 로이터는 지난 4월 조사 결과, 탄 CEO가 해당 리스트에 등재된 기업에는 직접투자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발언으로 정부 조사·의회 청문 가능성이 커졌으며, 이는 향후 투자자 신뢰를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인텔 전략을 잘 아는 전직 고위 임원은 “감독·조사 등 추가 규제 레이어가 쌓이면 구조조정 속도가 늦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탄 CEO의 ‘선택과 집중’ 전략
전직 임원은 “탄 CEO는 수익성 없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핵심 제품군에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라며 “만약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인텔이 시급히 해야 할 구조조정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 인텔은 대만 TSMC를 따라잡기 위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투자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왔으나, 실적 부진과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차입 여력이 악화됐다. 이에 따라 탄 CEO는 ‘투자 속도 조절’을 선언하며, 수요 기반 투자로 방식을 바꿨다.
시장에서는 “트럼프의 압박이 장기화될수록 인텔의 재무 부담 확대→신용등급 하락→투자 축소→경쟁력 약화라는 부정적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전망과 과제
결국 이사회와 탄 CEO가 트럼프와 어떻게 절충점을 찾느냐가 관건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내년 대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할 가능성”을 거론하며, 정·관·산 3각 협상이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한 애널리스트는 “탄 CEO 거취가 불확실할 경우, 고객사 설계 민감 정보를 다루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며 “삼성·TSMC 등 경쟁사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측통은 “2026년 양산 예정인 1.8nm 공정 성공 여부가 인텔 재기의 분수령”이라며 “CEO 교체로 로드맵이 흔들리면 수주 경쟁에서 치명타”라고 평가했다.
인텔 이사회는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으나, 주주총회 또는 비상이사회 개최 가능성이 제기된다. 투자자들은 “불확실성이 길어질 경우, 경쟁사 대비 주가 할인율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편, 미 상무부와 국방부는 “현 시점에서 조사 계획은 없다”고 밝혔으나,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는 “의회 차원의 공청회가 열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리하자면, CEO의 리더십 리스크와 정치적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인텔의 회복 로드맵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업계는 향후 3~6개월을 ‘골든타임’으로 보고, 이사회가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