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발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대해 러시아산 석유를 수입하는 인도·중국에 최대 100%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며 대서양 양측에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2025년 9월 11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미·EU 고위급 회의에 전격 호출돼 해당 제안을 전달했으며, 미국도 EU가 부과하는 관세를 ‘동일하게 미러링(mirror)’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백악관은 CNBC의 논평 요청에 아직 답하지 않고 있다.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회의 세부 내용은 기밀이라 공개하기 어렵다”면서도 “EU는 제재 집행 과정에서 인도·중국을 포함한 모든 글로벌 파트너와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조는 계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행위는 현재 19번째 제재 패키지를 준비 중이며, 제3국을 통한 우회 거래 차단을 위한 신규 도구를 도입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요구는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죄기 위해 러시아산 에너지 최대 구매국인 인도와 중국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EU는 자칫 양대 아시아 경제대국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이 인도와 별도의 무역협상을 진행 중인 민감한 시점이라는 점도 “시기상 부적절하다”는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미국은 이미 인도산 수입품에 50% 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25%는 러시아 에너지 거래에 대한 ‘징벌적 관세(punitive duty)’다. 인도 정부는 이를 “불공정하고 부당하다”고 반발하며, 미·EU 역시 러시아와 일정 수준의 교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휴전에 대한 노력보다 대(對)인도·중국 무역합의를 우선시하고 있다.” — 이언 브레머(Eurasia Group 창립자)
브레머는 이번 요구를 두고 “더 강력한 대러 제재를 유럽에 떠넘겨 미국 내부의 소극적 제재 태도를 정치적으로 가리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그는 “미·중 관계에 직접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도 책임 전가를 시도한 것”이라고도 분석했다.
시장 전략가 빌 블레인(Wind Shift Capital)은 EU가 관세를 ‘무역 무기’로 활용하는 데 거부감이 크다고 지적하며 “미국이 벌인 무역전쟁에 유럽이 휘말릴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이 트럼프 요구에 ‘노(No)’라고 답해야 한다”면서 “벌집을 건드린 건 트럼프, 결과도 그가 감당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러시아와의 복잡한 교역 맥락
EU는 2024년 러시아와 675억 유로(미화 781억 달러)의 양자 교역을 기록했다. 수입(359억 유로)은 주로 연료·광물에 집중됐고, 수출은 315억 유로였다. 2022년 전면 침공 이후 거래 규모는 크게 줄었으나 완전 중단에는 실패한 셈이다.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가 EU 가스 수입의 40%→11.6%(2024년)로 감소했음에도, 액화천연가스(LNG)·석유 등은 여전히 일정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EU가 제3국의 러시아산 에너지 거래를 강경 처벌하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유럽 동맹국에 미국산 LNG로 전환을 촉구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EU와의 ‘프레임워크 무역 합의’에서 EU 수출품에 15% 관세를 매기는 대신, 향후 3년간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LNG·석유·원전 연료 구매를 약속받았다고 주장했다.
더그 버검 미국 내무장관은 “미국산 LNG를 선적해 유럽에 보내면 러시아 시장점유율을 ‘제로’로 만들 수 있다”며 “미국 에너지 기업엔 기회, 러시아 전쟁자금은 고갈”이라고 말했다.
용어·배경 설명*
* 징벌적 관세(Punitive Duty)는 특정 국가의 정책‧행위에 대한 제재 목적으로 부과되는 고율의 추가 관세를 뜻한다. 단순 보호무역 관세와 달리 정치·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된다.
LNG(액화천연가스)는 천연가스를 영하 162℃에서 액화해 부피를 약 600분의 1로 줄인 형태다. 저장‧운송이 편리해 파이프라인 의존도를 낮춘다는 장점이 있다.
미러링 관세(Mirroring Tariff)는 동맹국이 부과하는 관세율을 같은 수준으로 자동 적용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무역 상대국에 ‘협공’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