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밀라노발 경제 전문 리포트 — 로레알(L’Oréal)을 비롯한 유럽 패션‧화장품 기업들이 미국 관세법에 숨어 있는 10여 년 묵은 ‘First Sale(첫 번째 판매)’ 규정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조항은 수입 상품의 관세 부과 기준을 ‘공장 출고가’로 낮추는 효과가 있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과한 고율 관세의 충격을 완화할 잠재적 우회로로 꼽힌다.
2025년 8월 1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합의한 대(對)EU 수입 관세는 대부분 품목에 15%가 적용된다. 이는 기존 평균 1.5% 수준의 열 배에 달한다. 물가 상승에 지친 미국 소비자에게 가격 전가를 쉽게 택하기 어려운 기업들은 대안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First Sale 규정이란?
‘First Sale’은 물품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 해외에서 두 번 이상 독립 거래가 이뤄졌음을 증명하면 관세 과세 기준을 최초 거래가격(공장 가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다.*1978년 미 연방법원 판례에서 시작된 관행
예를 들어, 공장에서 50달러에 출발해 도매상→미국 자회사→소매 단계로 이어지는 가방은 소비자 판매가가 200달러이더라도 50달러에 15% 관세만 부담하면 된다. 서류 작업과 공급망 투명성이 필수이므로, ‘큰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업계 1‧2위만이 활용 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로레알의 니콜라스 이에로니무스 최고경영자(CEO)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면밀히 검토 중”이라며 구체적 결정을 밝히지 않았다. 고든구스(Golden Goose), 몽클레르(Moncler),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들도 잇따라 같은 전략을 거론했다.
몽클레르의 루치아노 산텔 전무는 애널리스트들과의 통화에서 “제조원가가 수입 신고가의 절반 수준이어서 관세 절감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골든구스의 실비오 캄파라 CEO도 “15% 관세는 결과적으로 미국 소비자 가격을 약 3%만 올리는 데 그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미국 시장은 골든구스 매출의 35%를 차지한다.
컨설팅 업계 ‘문의 폭증’
PwC·KPMG·RSM 등 글로벌 회계·컨설팅사는 올해 들어 ‘First Sale’ 활용 문의가 평년 대비 최대 세 배 늘었다고 전했다. KPMG 파리 사무소의 루스 게레라 파트너는 “First Sale과 다른 관세 경감 프로그램을 조합하려는 문의가 급증했다”고 밝혔다.
서류전쟁과 리스크
First Sale을 적용하려면 ① 공장→중간상, ② 중간상→미국 수입사 등 모두 독립 법인 간 거래임을 입증해야 한다. 통상 기밀 유지 차원에서 미국 내 자회사가 중간 거래자를 맡는다. 미국 세관국경보호청(CBP)은 매년 현장·서류 감사로 부당 적용 사례를 가려내며, 적발 시 벌금을 부과한다.
미 무역·관세 전문 변호사 마이클 T. 콘은 “준비 비용과 감사 리스크 때문에 ‘여유 있는 기업’만이 접근 가능하다”며 “잘못 활용하면 제재가 가혹하므로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통계로 본 활용 현황
공식 통계는 없지만, 2009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조사에 따르면 수입 업체의 8.5%가 1년간 First Sale을 사용했으며, 이는 전체 수입액의 2.4%에 해당한다. 절반 가까이가 신발·의류 품목이었다.
프랑스 화장품 업계 ‘무관세 시대 종료’
로레알이 속한 프랑스 화장품 업계는 그간 0% 관세라는 특혜를 누렸으나 이제 15% 관세 현실을 마주했다. 프랑스 화장품협회(Febea)의 에마뉘엘 기샤르 국장은 “불확실성은 해소됐지만, 업계에는 중대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산업별 파급 전망
RSM 뉴욕의 마크 루트비히 파트너는 “섬유·의류 대기업은 이미 일부 활용해왔으나, 관세가 낮을 때는 관심이 미미했다”며 “지금은 비용 대비 효용이 크게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수출 컨설턴트인 루치오 미란다는 “패션 외에도 가구, 가전 등 다른 산업으로 확산이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결국 유럽 브랜드들이 거친(rough) 무역 환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선, 복잡한 ‘First Sale’ 회계 구조를 구축할 재무·법무 여력, 그리고 공급망 투명성이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