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주도했던 이른바 “칩(Chip)과 희토류(Rare Earth) 맞교환 전략”이 결정적 난관에 부딪쳤다. 미국이 엔비디아(Nvidia)의 다운그레이드형 인공지능(AI) 칩을 중국에 내주고 그 대가로 희토류 수출 규제 완화를 얻어내려 했으나, 베이징이 즉각적으로 해당 칩 구매를 중단함으로써 협상력이 되레 약화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2025년 8월 30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글로벌 증권사 제프리스(Jefferies)는 최신 노트에서 “‘칩 대 희토류’ 전략은 실패했다”고 못박았다. 보고서는 중국 정부가 엔비디아의 H20 등 ‘다운그레이드 AI 칩’의 구매를 “추가 공지가 있을 때까지” 전면 중단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엔비디아는 해당 칩의 패키징 및 서버 생산 라인을 이미 중단한 상태다.
“단기적으로 엔비디아는 중국에서 AI 칩 매출을 창출할 수 없을 것이며, 이는 미·중이 무역 협정에 다시 합의하기 전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 제프리스 리서치 총괄 에디슨 리(Edison Lee)
베이징의 전략적 우선순위는 ‘희토류’가 아닌 ‘웨이퍼 팹 장비(WFE, Wafer Fab Equipment)’ 확보에 맞춰져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중국은 더 진보된 미국산 AI 칩을 즉각 구입하기보다는, 국내 반도체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첨단 장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프리스는 “중국의 장기 목표는 자국산 AI 칩을 자체 생산해 미국 기술 의존도를 제거하는 데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리소그래피(노광)·메트롤로지(측정) 등 핵심 공정 장비에 대한 미국의 수출 제한이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들의 가장 큰 걸림돌로 남아 있다.
WFE란 무엇인가? WFE는 실리콘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고 검증·측정·식각·증착 등을 수행하는 초정밀 제조 설비다. 국내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머신 툴’로 불릴 정도로 핵심적이며, 노광 장비 1대 가격이 수천억 원을 상회하기도 한다.
제프리스는 전체 규제 완화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도 “미국이 일본·네덜란드 동맹국에 대한 압박을 완화할 경우 부분적 완화는 ‘딜 메이커’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이미 전 세계 WFE 설비 투자(capex)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어, 제한 완화 시 2026년 글로벌 WFE 수요 전망에 대한 시장의 ‘약세’ 시각이 되돌려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역 통계도 중국의 반도체 의존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24년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은 3,870억 달러로, 같은 해 석유 수입액 3,230억 달러를 웃돌았다. 반면 WFE 수입은 340억 달러에 불과했다. 자급자족을 위한 막대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반도체 분야 무역적자는 전년 대비 6% 증가한 2,270억 달러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의 계산은 엔비디아가 중국 AI 칩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동시에 희토류를 둘러싼 중국의 ‘무형 자산’이 재확인됐다. 희토류는 전기차 배터리·영구자석·국방산업 등 전략 산업의 필수 소재로,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정제량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시장 함의 및 전망에 대해 제프리스는 “우리가 2025년 하반기와 2026년 글로벌 WFE 수요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규제 완화가 현실화될 경우 이는 투자자에게 가장 예기치 못한 호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즉, 반도체 장비 섹터의 ‘베어캡(약세 관점)’이 급격히 전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사례는 희토류를 둘러싼 중국의 전략적 우위와 동시에, 베이징이 ‘칩’보다 ‘툴’에 더 가치를 둔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미국이 칩 수출 허용이란 당근을 내세웠음에도, 중국은 장비 확보라는 장기적 목표에 집중함으로써 단기적 유혹을 뿌리친 셈이다.
요컨대, 트럼프식 ‘칩 대 희토류’ 협상은 레버리지 확보에 실패했고, 반도체 장비·소재를 둘러싼 미·중 전략 경쟁은 ‘툴 전쟁’ 국면으로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