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무역 협상이 최종 결렬될 가능성에 대비해 ‘노딜(no-deal)’ 시나리오를 속도감 있게 준비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와 회원국 의회는 이미 광범위한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승인했으며, 필요 시 이른바 ‘무역 바주카(trade bazooka)’로 불리는 강력한 무기까지 꺼낼 태세다.
2025년 7월 25일, C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EU는 미국 측이 예고한 8월 1일부 30% 추가 관세에 맞춰 ‘동등 대응(tit-for-tat)’ 전략을 가동할 준비를 마쳤다. 유럽의회는 목요일 총 930억 유로(약 1,090억 달러) 규모, 식음료·의류·기계류 등 품목이 망라된 두 개의 관세 패키지를 하나로 통합해 가결했고, 각료이사회는 이를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현재 양측은 막판 협상을 이어가고 있으나, 여러 소식통은 CNBC에 현 시점 ‘기준 시나리오(base-case)’로 15% 관세가 거론된다고 전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막판에 결정을 뒤집는 사례가 빈번했던 만큼, 최종 합의안이 어떻게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보복 관세(retaliatory tariffs)의 구체적 내용
“미국이 30% 관세를 실제로 부과한다면, EU도 같은 세율로 상징성이 큰 미국산 모터사이클·자동차·의류·주류 등에 즉각 대응할 것” — 카르스텐 브레츠키 ING 글로벌 매크로 책임자
브레츠키 책임자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회원국 간 대응 수위에 의견 차가 있어 전 품목 일괄 부과는 어렵겠지만, 일단은 균형을 맞추는 선에서 신호를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부 회원국은 농업·와인처럼 자국 산업 보호를 우선시하는 반면, 다른 국가는 미국과의 외교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입장이다.
‘무역 바주카(ACI)’란 무엇인가?
EU가 언급하는 ACI(Anti-Coercion Instrument, 반강제수단)은 외부 세력이 무역·투자를 무기로 EU 정책 결정에 압박을 가하는 ‘경제적 강제’를 억제하기 위한 법적 장치다. 집행위 설명에 따르면 ACI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활용”이지만, 필요할 경우 수입·수출 제한, 공공조달 배제, 지식재산권 적용 정지 등 시장 접근 차단까지 가능하다.
알베르토 리치 유럽외교협의회(ECFR) 연구원은 CNBC에 “ACI가 ‘핵 옵션’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매우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EU 내부 기류가 갈수록 대미(對美) 강경으로 기울고 있어, 노딜 시 상대적으로 신속하고 ‘실질적’인 보복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리치 연구원은 동시에 “ACI는 협상 지렛대로 남겨둘 가능성이 높다”며, ① 8월 1일 미국 관세 발효 → ② EU 30% 보복 관세 시행 → ③ 미측 반응 부재 → ④ ACI 발동이라는 2단계 대응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배경·전망
EU와 미국은 전 세계 교역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규모의 상호 교역 파트너다. 그렇기에 이번 충돌은 단순한 양자 갈등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금융시장, 외교안보까지 파급력이 크다. 특히 독일·프랑스 등 제조업 중심국은 자동차 수출 비중이 높아 대미 관세에 민감하며, 스페인·이탈리아 와인 생산자는 농산물 보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시장 참여자들은 ‘노딜+상호 30% 관세’가 현실화할 경우 유로화 약세·글로벌 제조업 PMI 하락·원자재 가격 변동성 확대를 동시에 예상한다. 반대로 15% 수준의 ‘미니 딜’이 체결되면, 양측 모두 체면을 지키면서도 시장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도 존재한다.
한편, 한국·일본 등 수출 의존도가 높은 제3국은 EU·미국 간 관세 장벽 심화 시 ‘무역 전환 효과’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단, 글로벌 수요 자체가 위축될 경우 오히려 피해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 또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전문가 의견 및 추가 해설
무역 전문 변호사들은 “ACI가 발동되면 양측이 WTO(세계무역기구) 절차를 우회해 사실상 ‘맞불 관세’를 가속화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WTO 제소에는 평균 2~3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즉각적 대응을 원하는 각국 정부는 국내법 기반 제재 수단을 선호하는 추세다.
즉, 이번 사태는 ‘다자무역 질서 약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다시금 조명한다. 2018년 미중 관세전쟁, 2023년 EU-중국 전기차 상계관세 분쟁에 이어, G7 내부인 EU·미국까지 전면전에 돌입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글로벌 무역 규범의 미래가 시험대에 올랐다.
결국 시장의 시선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서명 여부와 EU 집행위의 발동 시점에 쏠려 있다. 관세·비관세 장벽이 동시에 강화되면 기업들은 공급망 재설계, 원가 전가, 가격 전략 등 전방위 대책을 검토해야 한다. 반면,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될 경우 단기 랠리 이후 근본적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게 된다는 점에서, 단기 투기적 흐름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용어 정리
무역 바주카(trade bazooka) : 대규모·전면적 보복에 비유해 붙인 별칭으로, ACI를 포함한 EU의 강경 수단 전체를 일컫는다.
동등 대응(tit-for-tat) : 상대국 조치와 동일한 수준의 제재를 즉각 맞불 형태로 적용하는 전략.
무역 전환 효과 : 기존 교역 상대국 대신 관세가 낮은 국가로 수입·수출이 이동하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