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IRO‧LONDON—영국 전 총리 토니 블레어가 2007년 이후 다시 한 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해 중동 외교 무대에 복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가자 지구 관리 기구인 ‘Board of Peace’(평화위원회)에 참여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중동과 영국 정치권 내부에서 동시에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섰다.
2025년 9월 30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블레어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20개 항의 가자 지구 평화 계획에 이름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72세의 블레어가 직접 참여 의사를 밝혔고, 그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팔레스타인 정계와 영국 노동당 내에서 커다란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타헤르 알노노(Taher Al-Nono) 대변인은 “
우리는 ‘외부 수호자’가 강제적으로 우리 국민을 통치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블레어의 역할을 정면 거부했다.
■ 과거 성과와 실패가 동시에 소환되다
블레어는 2007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직후, 미국‧러시아‧유엔‧EU로 구성된 중동평화 4자(Quartet)의 특사로 임명돼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과 경제 개발을 지원한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두 국가 해법 추진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은 2014년 좌초됐다.
이로 인해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를 “이스라엘 편향적 중재자”로 인식한다. 라말라(Ramallah)의 정치 평론가 하니 알마스리(Hani Al-Masri)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블레어의 평판은 ‘검은 기록’에 불과하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영국 내부에서도 비난이 거세다. 노동당 연례회의에 참석한 한 중동 국가 외교관은 블레어 관련 질문에 “too toxic(너무 독극물과 같다)”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노동당 의원 킴 존슨(Kim Johnson) 역시 “이라크 전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을 평화 임무에 기용하는 것은 ‘충격적이며 역겹다’”고 밝혔다.
■ 지지 진영이 제시하는 ‘실용적 이유’
반면, 일부 전·현직 외교관과 동료들은 ‘대체 불가’라는 실용 논리를 내세운다. 한 전직 영국 대사는 “블레어가 이스라엘에 무조건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 선출된 이스라엘 지도부가 용인할 수 있는 해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했다.
총리 시절 대변인을 맡았던 톰 켈리(Tom Kelly)는 “중동에서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인물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지적하면서, “블레어는 각 진영의 시각을 종합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지지자 미란 하산(Miran Hassan·Labour Middle East Council 국장)은 “그가 고위급 외교 채널을 동시에 활용해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자 지구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1999년 이라크 난민 출신으로서 블레어 지지를 밝히는 것이 “인기 없는 입장”임을 인정하면서도, 실용성을 강조했다.
■ ‘Board of Peace’란 무엇인가?
Board of Peace는 트럼프 대통령이 고안한 20개 조항의 가자 지구 종전 로드맵에서 핵심 기관으로 언급된다. 명확한 직제나 권한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ㆍ영국ㆍ걸프 국가 인사들이 공동으로 가자를 관리하고 전후 복구 및 치안·행정을 감독한다는 구상이다.
팔레스타인 측은 “외부 통치”를 문제 삼고 있으며, 하마스는 물론 서안지역(PA) 인사들까지도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블레어 측은 공식 논평을 삼갔으나, 보도자료에서 이번 계획을 “대담하고도 영리한 방안”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단, 그의 구체적 직책과 시기는 불확실하다.
■ 이라크 전쟁 ‘원죄’…여전한 그림자
블레어는 2003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에 동참해 영국군을 파병했다. 이 결정은 영국과 중동에서 지속적인 정치적 상처를 남겼고, 현재까지도 그의 ‘도덕적 정당성’을 약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거론된다.
일부 평론가는 “이라크 침공으로 생긴 불신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것은 실질적 설득력을 떨어뜨린다”고 분석한다. 반대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굿프라이데이 합의’) 체결 주역이라는 성공 사례를 근거로 들며, 복귀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시각도 있다.
■ 재단·사적 활동…‘정치 자산’ 관리
2015년 특사직에서 물러난 이후, 블레어는 Tony Blair Institute를 설립해 각국 정부에 거버넌스·디지털전환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미 IT기업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이 재정 후원자다. 또한 2008년부터 JP모건 국제 자문위원으로 지정학 자문을 수행하는 등 민간 부문 네트워크를 폭넓게 유지해 왔다.
이를 두고 지지자들은 “미국·이스라엘·걸프국 모두와 신뢰 채널을 갖춘 몇 안 되는 서방 정치 지도자”라고, 반대자들은 “기업 이해관계가 외교적 중립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 향후 전망
가자 평화위원회 구상이 실제 이행될지는 아직 미정이다. 그러나 블레어가 이름을 올린 사실만으로도 중동 평화 담론을 다시 자극하고 있으며, 그의 ‘복귀’가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요구를 어떻게 조율할지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외교가에서는 “협상 테이블에 모든 플레이어가 앉는 것 자체가 진전”이라는 신중론과 “대표성 부족이 되레 갈등을 격화시킬 것”이라는 회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최종 결론은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걸프국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형 속에서 향후 수개월 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