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2025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José Antonio Kast) 후보의 승리로 보수·우파 쪽으로 뚜렷한 방향 전환을 보였다. 카스트는 범죄와 이민 문제에 대한 유권자 불안을 전면에 내세워 표를 결집했으며, 이번 당선은 1990년 군부 독재 종식 이후 국민적 정치 지형에서 나타난 가장 급격한 우향(右向) 이동 중 하나로 평가된다.
2025년 12월 15일, 로이터의 보도에 따르면, 카스트는 결선투표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좌파 후보 자네트 하라(Jeannette Jara)를 상대로 58%의 득표율을 기록해 42% 득표에 그친 하라를 제치고 승리했다. 하라는 즉시 패배를 인정했다.
카스트는 수십 년에 걸친 정치경력 동안 일관되게 강경한 우파 노선에 섰다. 그는 국경 장벽 설치, 치안이 취약한 지역에 군 투입, 불법 체류 외국인 전면 추방 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선거 운동 기간에 그는 범죄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제적 변화’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안전이 없으면 평화가 없다. 평화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으면 자유가 없다. 칠레는 범죄, 불안, 공포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회복할 것이다.”
선거 배경과 정치 지형
카스트의 이번 당선은 중남미 전역에서 최근 들어 관찰되는 우파·중도우파의 약진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보도는 에콰도르의 다니엘 노보아,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미레이 등과 함께 카스트의 승리를 지역적 흐름의 일환으로 봤다. 또한 10월 볼리비아에서 중도 성향의 로드리고 파즈 당선으로 오랜 사회주의 정권이 막을 내린 사례도 인용됐다.
결선투표(런오프)란 다수의 후보가 출마한 본선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상위 두 후보가 재대결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번에 카스트는 2021년 결선에서 좌파의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에게 패한 데 이어 세 번째 대선 도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유권자 동향과 지지 기반
치안과 이민 문제에 불안감을 느낀 유권자들이 카스트로 향한 것으로 분석된다. 칠레 내 일부 전통적 좌파 지지 지역에서도 하라에 대한 거부감이 표출됐는데, 이는 그녀가 공산당 소속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유권자에게는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인식된 측면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있다. 칠레대학 정치학자 클라우디아 하이스(Claudia Heiss)는 이러한 측면을 이번 선거 결과의 한 요인으로 지적했다.
현장에 있던 23세 공학도 이그나시오 세고비아(Ignacio Segovia)는 카스트 지지자들 가운데 하나로, 붉은색 모자에 영어 문구 “Make Chile Great Again”을 새긴 것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란 시기의 칠레는 안전하고 자유롭게 거리로 나갈 수 있던 사회였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치안·이민 정책과 주요 공약
카스트는 미국의 이민단속국(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 ICE)에서 영감을 받은 집행조직을 창설해 불법 체류자를 신속히 체포·추방하겠다고 제안했다. ICE는 미국 내 이민 단속과 국경 관리, 이민 관련 수사 등을 담당하는 연방기관으로, 카스트의 제안은 해당 모델을 칠레의 국내 실정에 맞게 도입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더해 공공지출 대폭 삭감 추진 역시 그의 핵심 경제 공약 중 하나다.
다만 그의 급진적 성향의 일부 정책은 의회에서 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상원은 좌우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하원에서는 포퓰리즘 성향의 인민당(People’s Party)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 따라서 카스트는 넓은 유권 기반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책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정치 분석가들은 지적한다. 발파라이소대학의 정치학자 기예르모 홀츠만(Guillermo Holzmann)은 “카스트에게 표를 준 모든 이들이 그의 당 소속은 아니다. 상당 부분의 표가 빌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사안: 낙태와 종교적 배경
카스트는 가톨릭 신자로서 9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과거 낙태와 응급 피임(사후피임약)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최근 선거운동에서는 이 주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칠레의 낙태 관련 법을 변경하려면 의회 과반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며, 여론조사도 현재 칠레 국민의 다수가 현행 권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 부분은 의회에서 난망일 가능성이 크다.
안보 현실: 범죄 증가와 이민 흐름
칠레는 여전히 중남미 국가들 중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지만, 최근 수년간 폭력 범죄가 급증해왔다. 이는 페루·볼리비아 등 코카 생산국과 접한 북부 사막 지역의 국경이 비교적 개방적이고, 주요 국제 해운항이 있어 조직범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환경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또한 베네수엘라 등에서 온 이민자 급증은 인신매매·성매매 등 범죄의 취약 대상을 늘려 치안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파급효과와 전망
칠레는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이며 리튬의 주요 생산국이기도 하다. 보수·시장친화적 정책에 대한 기대감은 이미 현지 증시와 페소화, 주요 주가지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보도는 카스트의 승리가 발표된 직후 시장의 낙관적 반응이 나왔음을 언급했다. 이는 규제 완화와 친시장 정책이 투자자 신뢰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그러나 보다 급진적인 정책의 실행 가능성은 의회의 민감한 균형 때문에 제한될 수 있다. 예컨대 대규모 공공지출 삭감이나 이민 강경조치의 전면적 시행은 사회적 갈등과 법적 저항을 야기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노동시장·내수 수요에 영향을 미쳐 경제성장률에 부정적 변수를 제공할 위험도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통화·주가의 안도 랠리가 이어질 수 있으나, 중장기적 경제 성과는 정책의 현실적 이행 여부와 의회 협상 능력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특히 광물 자원(구리·리튬) 부문에서는 규제 완화와 투자 유인책이 실제로 도입될 경우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채굴 관련 설비투자 증가, 고용창출, 수출 확대 등 긍정적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환경 규제 완화는 국제 시장의 비판과 수입국의 무역·투자 조건 변화로 이어져 장기적 리스크를 부각시킬 수 있다.
정치적 과제와 향후 전망
카스트는 폭넓은 유권자 기반을 만족시키기 위해 당선 후 온건한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핵심 지지층의 기대(강경 치안정책·이민통제 등)와 의회 내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특히 상원의 균형과 하원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정당 구도는 그의 정책 추진력을 제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스트 정부의 초기 정책은 치안 강화와 이민 통제, 공공지출 구조조정 등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실제 입법과 집행 과정에서 상당한 타협과 조정이 불가피하다. 또한 그의 당선은 중남미 지역의 정치 지형 변화와 연결되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