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허름한 로프트에서 출발한 한 줄의 코드가 10년 만에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배관으로 진화했다. 이더리움 공동 창립자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과 초기 개발자들은 2015년 ‘프론티어(Frontier)’라는 이름의 첫 라이브 네트워크를 세상에 내놓았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세련된 편의 기능도 없었지만 채굴·스마트컨트랙트 실행·탈중앙 애플리케이션(dApp) 테스트라는 세 가지 핵심 기능만으로 암호화 생태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25년 8월 2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더리움은 현재 시가총액 4,2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며 월가와 각국 금융 당국이 주목하는 블록체인 인프라가 됐다. 비탈릭 부테린은 프랑스 칸에서 열린 ‘ETHCC’ 기조연설에서 “이 공간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면, 이더리움은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로 불린다. 즉, 단순 송금 기능을 넘어 코드 자체가 금융 자산을 이동·보관·계약 이행까지 담당한다. 10년 전 IBM 연구팀을 이끌던 폴 브로디(Paul Brody)가 어린 학생으로 오해받던 부테린을 취리히 연구소에서 만난 일화는 이더리움의 가능성을 예고한 상징적 사건으로 회자된다.
IBM·삼성에서 EY까지… 대기업이 선택한 이유
브로디는 2015년 CES에서 IBM·삼성과 함께 이더리움 기반 초기 블록체인 프로토타입을 공개한 뒤 “다른 기술은 잊고 블록체인에 올인했다”고 회상한다. 현재 EY 글로벌 블록체인 총괄로 재직 중인 그는 “이더리움이 금융 네트워크에 직결(Docked)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관은 속도보다 안정성을 원한다. 부테린 역시 “대부분의 기관이 우리에게 직접 ‘이더리움은 멈추지 않기에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로빈후드·도이체방크·코인베이스·크라켄 등 주요 기업은 각각 다른 ‘레이어2’(확장성 보조체계)를 선택했지만, 최종 정산은 모두 이더리움 본체에서 이뤄진다.
“10년간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보안성과 검열 저항성, 그리고 거버넌스의 투명성 때문에 기관은 결국 이더리움을 고른다.” — 토마시 스탄착(Tomasz Stańczak), 이더리움재단 공동 집행이사
월가의 ‘새 배관’으로 스며드는 스테이블코인
스테이블코인(가격이 달러 등 실물 자산에 고정된 가상화폐)은 이더리움에서만 연간 28조 달러(도이체방크 자료) 규모로 결제·정산되고 있다. 이는 마스터카드와 비자의 총 거래액을 합친 것보다 많다. 특히 서클(Circle)의 USDC는 전체 거래량의 65%를 이더리움 네트워크에서 처리한다.
2025년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GENIUS법’은 스테이블코인 규제·감독 틀을 제공하며, 서클의 IPO(기업공개)와 맞물려 이더리움 기반 디지털 달러의 제도권 편입을 가속했다. 블랙록은 2024년 출시한 이더리움 기반 머니마켓펀드 ‘BUIDL’을 통해 자격 투자자에게 USDC로 실시간 상환이 가능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레이어2와 제로지식증명… 확장성과 프라이버시를 동시에
이더리움은 2022년 ‘머지(The Merge)’ 업그레이드에서 작업증명(PoW)을 지분증명(PoS)으로 교체하며 에너지 사용량을 99% 이상 절감했다. 이제 과제는 속도와 수수료다. 제로지식증명(ZKP)은 거래 내용을 노출하지 않고도 유효성을 증명하는 기술로, 스마트워치 수준의 컴퓨팅 파워로도 전체 체인의 규칙 준수를 검증할 수 있게 해 준다.
[용어 설명]
• 스마트컨트랙트: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실행되는 프로그램형 계약.
• 레이어2: 메인체인(레이어1)의 트래픽을 줄이기 위해 별도로 구축된 보조 체인 또는 롤업 기술.
• 제로지식증명: 거래 데이터 자체를 숨긴 채로 ‘규칙을 지켰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암호 기술.
토큰화·24시간 주식 거래… 전통증권의 경계가 무너진다
로빈후드는 2025년 6월 아비트럼(Arbitrum) 기반으로 토큰화된 미국 주식을 출시했으며, 크라켄은 5월 미국 외 지역에서 애플·엔비디아 주식 토큰의 24시간 거래 계획을 발표했다. 코인베이스도 7월 실적 발표에서 ‘토큰화 주식·예측시장’을 미국 내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브로디는 “자금 흐름이 점차 블록체인 레일로 이동할 것”이라며 “새 금융상품은 기존 시스템 복제에 그치지 않고 블록체인이 가능하게 하는 전혀 새로운 기능을 사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기술 표준 전쟁에서 한 플랫폼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 왔다는 역사적 경험을 들어, 이더리움이 결국 ‘세계의 프로그래밍 레이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은 과제: 확장성과 분산성의 균형
부테린은 “우리는 아직 결승선(finish line)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향후 10년은 트랜잭션 처리 속도를 끌어올리면서도 탈중앙성과 보안을 강화하는 ‘트릴레마(trilemma)’ 해결이 관건이다. 개발팀은 대규모 컴퓨팅 공격에도 견디는 알고리즘 개선, 개인 정보 보호 기능 강화 등 후속 업그레이드를 준비 중이다.
그는 또 “변화는 폭발적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성장으로 다가온다”며 “언젠가는 기존 금융 인프라를 들여다볼 필요조차 없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론적으로, 이더리움은 10년 만에 사이버펑크의 이상에서 전통 금융의 표준으로 변모했다. 10년간 멈추지 않은 네트워크, 기관 신뢰를 얻은 보안·합의 구조, 그리고 무한에 가까운 프로그래머블 공간이 월가의 새 배관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지금, 부테린과 브로디가 그리는 다음 10년은 ‘보이지 않는 혁신’의 시간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