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갈등이 또다시 확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 상무부(Ministry of Commerce)가 미국산 아날로그 칩에 대해 덤핑(불공정 저가 판매) 조사에 착수했지만, 글로벌 투자은행 UBS는 해당 조치가 미국 주요 아날로그 칩 제조사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2025년 9월 15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UBS 전략가들은 고객 메모에서 “이번 조사는 Texas Instruments(TI)와 Analog Devices(ADI) 등 미국 업체를 직접 겨냥하고 있으나, 최종 결론이 2026년 9월 이전에 내려질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했다. 또한 조사 기간은 특정 사유가 있을 경우 최대 6개월 추가 연장될 수 있어, 실제 규제·관세 부과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분석된다.
UBS는 이번 발표를 “중국의 방어적 대응”으로 해석했다. 바로 직전, 미국 상무부가 23개 중국 기업을 포함한 총 32개 법인을 수출 통제 대상(Entity List)에 올린 데 대한 맞대응 성격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이 가운데 두 개 중국 기업이 워싱턴의 제재 대상인 SMIC(중국 반도체 제조 국제공사)에 규제 장비를 공급했다고 지목했다.
UBS 애널리스트들은 “이번 중국 조사는 2022년 미국 정부가 중국 아날로그 칩 업체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반덤핑 조사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되풀이(replication)’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양국이 서로 동일 프레임으로 맞대응하면서, 실질보다는 정치·외교적 메시지를 강화하는 행위라는 해석이다.
주가 반응
조사 소식이 전해진 16일(현지 시각) 프리마켓 거래에서 TI 주가는 약 -3% 하락했고, ADI 주가 역시 -0.7% 소폭 낮아졌다. 반면, 베이징이 발표한 직후 중국 내 반도체 관련주는 전반적으로 상승세를 보였다.
이중 조사 착수
중국은 이번에 두 가지 별도 조사를 병행한다고 밝혔다. 첫째는 미국의 반도체 정책 및 무역 관행이 중국 기업을 차별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조사이고, 둘째는 보청기·자동차·Wi-Fi 라우터 등 다양한 기기에서 사용되는 아날로그 칩이 미국으로부터 덤핑 가격으로 수입됐는지를 규명하는 절차다.
“이번 조치는 오는 일요일(15일)부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미·중 고위급 통상 협상 직전에 발표됐다”
는 점도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협상 테이블에서 양국이 협상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 용어 해설 및 시장 맥락
아날로그 칩(Analog Chip)은 전압·전류 등 연속적인(아날로그) 신호를 처리하는 반도체 부품으로, 디지털 칩보다 공정 난이도가 낮지만 센서·전력 관리·오디오·RF(무선 주파수) 등 실물 세계와 전자 시스템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담당한다. 덤핑(Dumping)이란 해외 시장에 자국 제품을 국내 가격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판매해 경쟁사를 압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TI, ADI와 같은 미국 업체는 중국 매출 비중이 20% 이하로 상대적으로 낮다”며, 이번 조치가 재무적 악재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공급망 다변화, 현지화 전략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정치·외교 측면에서는 미·중 양국이 “상호 제재→보복→재제재”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최근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 중국의 희토류(갈륨·게르마늄) 수출 규제 등으로 갈등이 누적된 상태다. UBS는 “이번 조사 역시 상징적 의미가 크며, 실제 제재 효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베이징이 조사 기간을 2년 이상으로 설정한 점도 눈길을 끈다. 업계 관계자는 “조사를 길게 가져가면 협상카드로 쓰기에 유용하다”면서, “관세·벌금 부과 같은 강경 조치를 언제든 꺼낼 수 있다는 시그널을 미국에 전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 기자의 시각
이번 사안을 두고 시장에서는 “겉으로는 무역 분쟁, 실제로는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날로그 칩 자체는 첨단 AI 칩에 비해 정치적 민감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압박할 수 있는 연결고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중국이 ‘하이테크’가 아닌 ‘로테크’ 부문에서도 제조 주권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 생태계를 “좁은 목”으로 압박하는 전략도 한층 강화되고 있다. 결국 양국 모두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기업들은 규제 리스크와 공급망 재편 비용이라는 이중 부담을 떠안게 된다. 단기 주가 변동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자본·기술·허가 분야의 비용 구조가 어떻게 바뀌는지가 관전 포인트다.
결론적으로, UBS의 분석처럼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연장 가능성을 포함해 최대 30개월이라는 조사 기간 동안, 미·중 반도체 구도가 크게 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투자자들은 단기 주가 흐름보다는 정책 방향성과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