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브뤼셀‧런던발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통상 정책에 대한 경각심이 달러 가치를 수년 만의 저점으로 끌어내리던 가운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5월 말 유럽 정상들에게 “말이 아닌 통화 행동”을 요구했다.
2025년 9월 22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라가르드 총재는 베를린 연설에서 “트럼프식 경제 질서 교란”을 단일통화 영향력 확대의 호기로 규정했다. 전임 총재 마리오 드라기 시대부터 논의된 금융 시스템 전면 개혁 구상을 토대로, 그녀는 이를 “글로벌 유로 모멘트”라 명명했다.
라가르드 측근이 로이터에 전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 재무장관 출신인 라가르드는 이번 계기가 유럽의 결정적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지도자들의 미흡한 리더십에 실망감을 표했다. 한 목소리라도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드라기가 보고서를 발표한 지 1년, 라가르드가 호소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 단일통화의 토대를 강화하자는 호출은 국가 간 분열과 우크라이나 전쟁·트럼프 변수·자국 정치 불안 등 당면 과제에 묻혀 버리고 있다.
“근본적으로 EU는 여러 위기를 동시에 집중적으로 다루기 어려워한다.”
— 엔리코 레타 전 이탈리아 총리
레타 전 총리는 로이터와의 통화에서 “오늘의 유럽은 분열돼 있다”고 단언했다.
달러 패권과 유로의 현실
유럽 20개국 3억5,000만 명의 지갑 속에 자리 잡은 유로는 EU의 가장 가시적 성취이지만, 국제무대에서는 달러가 여전히 절대 강자다. 달러는 세계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의 약 60%를 차지하며, 원유 등 주요 원자재 거래의 결제 통화로도 쓰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7월 “Dollar is king”이라며 패권 유지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유로는 세계 2위 통화다. 글로벌 외환보유액·무역 청구 기준 각각 약 20%를 차지하며, 유로존 외 국가·지역 60곳이 자국 통화를 유로에 연동하고 있다. 올해 들어 달러 대비 13% 상승해 4년 만의 고점에 근접했는데, 이는 미 연준의 금리 인하 사이클 전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자유무역 시대가 보호무역 기조로 전환되고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유럽 지도자들은 유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 환율 변동·자본 유출입 충격뿐 아니라 대러 제재와 같은 경제 제재 리스크도 완화할 수 있다고 본다.
걸림돌 1 — ‘안전자산’ 공동채권
첫 번째 과제는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매입할 만한 대규모 안전자산(safe asset)을 공급하는 일이다. 유로존 국채 잔액은 13조 달러 수준으로, 30조 달러 규모의 미 국채 시장에 크게 못 미친다. 독일 국채 2조3,000억 달러어치는 ‘철벽’이라 불리지만, 이탈리아나 정치 불안에 시달리는 프랑스 국채는 평가가 엇갈린다.
2010년 유로존 부채 위기 당시 제안된 ‘블루·레드 본드’ 구상은 회원국 국내총생산(GDP)의 60%에 해당하는 부채를 공동보증 ‘블루 본드’로 전환하고, 초과분은 각국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는 ‘검소한 북부’ 독일‧네덜란드가 ‘방만한 남부’와 부채를 공유하지 않겠다며 번번이 막혔다.
코로나19 팬데믹(2020년) 때 8,000억 유로 규모 NGEU(차세대 EU) 기금이 첫 공동채 발행으로 간신히 성사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의 NATO 회의론은 ‘유럽 방위 공동채’에 대한 기대를 키웠지만, 2025년 2월 취임한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헌법이 보장한 ‘부채 브레이크’ 완화 쪽으로 선회, 독일 단독 국채로 국방비를 조달하기로 했다.
4월 바르샤바 EU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방위 조달을 위한 공동차입안이 재론됐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온도차를 보이며 사실상 무산됐다. 독일은 “구체 프로젝트가 먼저”라는 논리를 폈고, 프랑스는 국방 주권을 이유로 망설였다.
용어 설명*
* 블루 본드: 20개국이 공동보증하는 안전자산 형태의 국채.
* 레드 본드: 각국이 단독 책임을 지는 초과부채.
걸림돌 2 — 자본시장·은행동맹 완성
두 번째 과제는 자본시장연합(CMU) 및 은행동맹(Banking Union) 마무리다. 이는 파산절차·공모규정·세제 등 국가별 규칙을 조화해 투자 흐름을 원활히 하는 프로젝트다. 2014년 장클로드 융커 당시 EU 집행위원장이 최우선 과제로 삼았지만, 10년 가까이 ‘절반의 진전’에 머물러 있다.
라가르드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견줄 ‘유럽판 SEC’로서, 파리 소재 ESMA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난해 4월 EU 정상회의에서도 독일·프랑스가 힘을 실었으나, 룩셈부르크·몰타·아일랜드 등 소형 금융허브들이 “감독권 이양 불가”를 외치며 막아섰다.
EU 정상들은 6월 회의에서 “유로의 국제적 입지를 과감히 강화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합의했다. 연말까지 금융교육 확대·소액투자 진입장벽 해소 등이 추진되지만, ESMA 권한 강화 같은 핵심 사안은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
걸림돌 3 — 디지털 유로, 지연되는 출범
세 번째 과제는 디지털 유로 도입이다. 이는 블록체인 기반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증가세와 중국 위안화의 전자화폐 실험에 대응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EU 집행위가 마련한 관련 법안은 2년 넘게 계류 중이다.
은행권·의회는 “예금 유출·막대한 초기 비용에 비해 실익이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스페인 국회의원 페르난도 나바레테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처럼 만능이라 주장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의 ‘정밀도’가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주 코펜하겐 EU 재무장관 회의에서 로드맵이 합의됐지만, 법안 통과는 빨라야 2026년 중반이며 기술 구축에는 추가 3년이 소요된다. 세 참석자에 따르면, 라가르드는 해당 일정이 자신의 임기(2027년) 내 완료되지 못한다는 점에 실망을 표했다.
위안화와 금 — 새로운 도전자
달러를 단숨에 대체하긴 어렵지만, 유로가 ‘글로벌 넘버 투’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조차 도전받고 있다. OMFIF가 5월 중앙은행 75곳을 조사한 결과, 16%만이 12~24개월 내 유로 비중 확대를 계획했다. 대안 투자로 금이 가장 큰 수혜를 받고, 장기적으로는 중국 위안화가 선호된다는 답변이 다수였다.
“ECB가 아시아 국가에도 원활한 통화스와프 라인을 제공해야 유럽 투자가 쉬워진다.”
— 덴잔발지르, 몽골 중앙은행 이사
현재 ECB는 주로 서방 16개국 중앙은행과 유동성 스와프 계약을 체결 중이다.
라가르드의 ‘느리다’는 경고
라가르드는 9월 15일 파리 연설에서 “유럽의 지정학·지경제적 갑옷에 존재하는 금이를 메우라”고 주문했다. 그녀는 “우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느리고 고되다”며 속도전을 촉구했다.
전문가 해설 — 라가르드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듯, 유로의 국제화는 경제·금융통합 심화와 공동부채 확대 없이는 진전되기 어렵다. 그러나 회원국 간 이해 상충이 뚜렷한 이상, ‘글로벌 유로 모멘트’가 실행 가능한 창(窓)으로 남아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