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발 —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연립여당이 참패하면서 일본은행(BOJ)이 통화정책 운용에서 이중 딜레마(double bind)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선거 이후 야당의 대규모 재정지출 요구가 현실화되면 물가 상승세가 장기화할 수 있는 반면, 정치적 교착 상태와 글로벌 무역전쟁 우려는 금리 인상을 늦춰야 할 명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22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엔화 약세가 심화돼 수입 물가가 오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는 이미 세 차례 연속으로 2%를 웃돌고 있는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맞물려 BOJ의 ‘관망 기조’와 충돌할 수 있다.
생활비 부담 증가는 20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이끄는 집권 연립여당이 참패한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년 넘게 BOJ 목표치인 2%를 상회하는 상황에서, 일부 정책위원들은 이미 “물가 압력이 확대되고 있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정책위원 코에다 준코는 최근 “쌀값 상승이 2차 효과(second-round effects)로 이어지지 않는지 면밀히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위원 다카타 하지메는 이달 초 “일본이 2% 목표 달성 직전에 와 있으므로 일시적 숨 고르기 이후 금리 인상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방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커진다면 BOJ는 물가 안정의 수호자 역할을 위해 단호히 움직여야 한다.” — 다무라 나오키 정책위원 (6월 발언)
정치적 타협이 초래할 재정 확대
이번 패배로 이시바 총리는 중·참 양원 모두에서 과반을 상실해 야권과의 타협 없이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게 됐다. 야당은 소비세(부가가치세) 인하와 대규모 경기부양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시바 총리는 21일 “물가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계를 지원하기 위해 다른 정당과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비세 인하는 재정적자 심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법 개정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올가을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해 현금 지원과 세제 감면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규모는 지난해 14조 엔(약 950억 달러)을 넘어설 것이란 전망도 있다.
컨설팅 업체 Eurasia Group의 데이비드 볼링 이사는 “미국 관세로 타격을 받은 기업 지원을 위해 추경 편성은 선거 전부터 예상됐지만, 야당의 압박으로 더 큰 규모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엔화 향방이 정책 결정의 열쇠
1분기 일본 GDP가 역성장한 데다 자동차 산업이 미국 관세로 직격탄을 맞으면서 경기 부양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그러나 국채 잔액이 GDP의 260%를 넘어선 국가 부채와 정치 불안이 맞물리면 외환시장에서 엔화 약세가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NLI연구소의 우에노 쓰요시 이코노미스트는 “이시바 총리가 사퇴할 뜻이 없음을 시사하면서 시장은 일단 관망세지만, 선거 패배로 행정부 위상이 약화된 만큼 엔화 추가 하락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실질금리(real interest rate)는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값으로, 일본은 장기간 초저금리 정책 탓에 다른 선진국 대비 깊은 마이너스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BOJ는 올해 1월 단기 정책금리를 0.5%로 올린 뒤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미국 관세의 충격이 확인될 때까지 추가 인상을 보류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해 왔다.
미국발 관세 충격을 고려해 다수 애널리스트는 올해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이 낮다고 보지만, BOJ 내부 추정에 따르면 정책금리가 최소 1%까지 올라야 경기 부양과 긴축이 균형을 이루는 중립 수준에 도달한다.
결국 엔화가 1달러당 150엔을 하회하며 약세가 가속화되면, 이는 물가를 끌어올려 BOJ가 다시 금리 인상에 나서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치와 중앙은행의 미묘한 관계
BOJ는 법률상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역사적으로 정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2013년 ‘아베노믹스’ 당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엔고(엔화 강세)와 디플레이션 탈피 압박을 강화하자 BOJ는 사상 최대 규모의 양적완화에 돌입했다.
또 지난해 BOJ가 초완화 정책에서 출구 전략을 본격화한 배경에도 엔화 급락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에 대한 정치권의 우려가 있었다. 이에 대해 BOJ 관계자는 “선거 결과가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어떻게 바꾸고, 시장이 이에 어떻게 반응할지가 최대 관심사”라고 전했다.
노무라증권의 이와시타 마리 수석 금리 전략가는 “엔화가 147엔에서 150엔 아래로 장기간 머무르면 10월 회의에서 금리 인상이 단행될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지속적인 엔화 약세는 기저 인플레이션을 밀어 올릴 수 있어 정책변화의 주요 촉발 요인이 될 수 있다.” — 이와시타 마리 (노무라증권)
*환율 기준: 1달러=147.43엔(보도 시점)
용어 풀이 및 전문가 시사점
• 이중 딜레마(double bind): 상반된 목표가 동시에 요구돼 어느 쪽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의미한다.
• 2차 효과(second-round effects): 원자재·상품 가격 상승이 임금·서비스 가격 인상으로 연쇄 전이되는 현상.
• 실질금리: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차감한 값으로, 물가가 오를수록 실질금리는 낮아진다.
본 기자는 추가경정예산 확대와 엔화 흐름이 맞물리면서 BOJ의 정책 경로가 불가피하게 ‘점진적 인상→장기 동결’ 시나리오로 압축될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정치권의 재정 팽창 요구가 현실화될수록 국채 금리 상승 압력이 커져, BOJ가 장단기금리조작(YCC) 제도를 다시 손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