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패션계 ‘왕’ 조르지오 아르마니 별세…남성복을 혁신한 거장, 91세로 생을 마감하다

[패션 업계 거장 별세]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가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간결함을 통해 우아함을 구현한 그는 1970년대 재킷의 해체(deconstruction)를 통해 남성 정장을 혁신하며 세계 패션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어깨 패드를 제거하고, 단추 위치를 옮기며, 비율을 조정해 재킷을 ‘가디건처럼 부드럽고 셔츠처럼 가벼운’ 옷으로 재해석했다. 이는 이후 50년에 걸친 ‘미니멀리즘 수트’의 출발점이 됐다.

2025년 9월 4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아르마니 그룹은 성명을 통해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컬렉션과 미래 프로젝트에 헌신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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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에서는 그를 Re Giorgio(‘왕 조르지오’)라 부른다. 그는 기성복(프레타포르테, prêt-à-porter)과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향수, 인테리어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연간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콩글로머릿을 일군 경영자이기도 했다.

“옷에서 모든 경직성을 제거하고 예상치 못한 자연스러움을 발견했다.” — 조르지오 아르마니

그는 ‘패션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라 강조하며, 과도한 장식을 거부했다. 1990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Made in Milan’에서 “나는 전시에 가까운 과시(exhibitionism)를 참을 수 없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 성장 배경과 밀라노의 인연

1934년 7월 11일,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에서 태어난 그는 전후 혼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우고(Ugo Armani)는 회계사였으며, 어머니 마리아 라이몬디(Maria Raimondi)는 재봉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우리는 가난했지만 잘 차려입은 아이들이었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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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을 피하려 여동생 로잔나를 재킷으로 감싸 안았던 경험은 재킷에 대한 그의 애착을 더욱 깊게 했다. 전쟁 후 가족은 밀라노로 이주했으며, 이 도시는 훗날 ‘세계 패션 수도’로 도약하는 데 아르마니의 결정적 기여를 받게 된다.

의대를 자퇴한 그는 군 복무 후 백화점 라 리나센테(La Rinascente)에서 쇼윈도 연출 일을 하며 패션에 발을 들였다. 1960년대 중반 니노 체루티(Nino Cerruti) 브랜드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재킷 해체 작업을 시도했다.


■ 두 사회적 흐름과의 공명

아르마니는 20세기 후반 ‘여성의 사회 진출’‘남성성의 유연화’라는 두 트렌드를 선구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2024년 에스콰이어(Esquire) 인터뷰에서 “여성과 남성이 자신 안의 부드러운 면을 인정하는 시대를 예견했고, 그것이 성공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1975년 첫 남성복 컬렉션을 발표한 그는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American Gigolo)’에서 배우 리처드 기어를 의상 협찬하며 미국 시장을 매료시켰다. 같은 해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이 아르마니 여성 부티크를 오픈해 트랜스애틀랜틱 성공이 가속화됐다.

1982년 타임(Time)지는 ‘Giorgio’s Gorgeous Style’이라는 표지 기사로 그를 조명했으며, 이는 이탈리아 패션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 ‘완벽주의자’ 경영자로서의 면모

광고, 모델 헤어스타일까지 직접 점검하던 그는 “주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고 말할 만큼 일에 몰두했다. 그는 자서전 ‘Per Amore(사랑으로)’에서 “일에서 얻는 아드레날린이 최고의 환위(歡慰)”라며 ‘일은 일종의 오르가슴’이라 표현했다.

그는 2024년 10월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2~3년 안에 은퇴를 고려한다”고 밝혔으나, 2025년 6~7월 건강 문제로 병원 치료를 받으며 처음으로 패션위크 불참을 경험했다.


■ 사업 파트너와 가족 경영

아르마니는 1966년 피렌체 근교 휴양지 포르테 데이 마르미(Forte dei Marmi)에서 만난 세르조 갈레오티(Sergio Galeotti)와 함께 회사를 창업했다. 갈레오티는 1985년 에이즈로 40세에 타계했지만, 아르마니는 가족과 측근 레오 델오르코(Leo Dell’Orco)와 함께 기업을 확장했다.

특히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같은 저가 라인을 도입해 ‘명성은 유지하되 가격 문턱은 낮추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프라다, 돌체앤가바나 등 다른 이탈리아 브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호텔, 초콜릿, 인테리어 등 다각화로 영역을 넓힌 그는 밀라노·브로니·판텔레리아·포르테 데이 마르미·뉴욕·파리·생트로페·생모리츠·앤티가 등 세계 곳곳에 부동산을 소유하며 사치도 누렸다. 또 농구팀 올림피아 밀라노의 구단주이기도 했다.

그는 상장(IPO)을 거부하고, 투자 제안을 모두 고사하며 독립성을 고수했다. 2014년 2억7,000만 유로를 납부하며 세무 분쟁을 종결했고, 2024년 협력업체의 노동 착취 의혹으로 계열사가 사법 관리에 들어가는 등 논란도 겪었다.


■ 직설 화법과 논쟁

2020년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여성은 디자이너들에게 계속해서 ‘강간당하고’ 있다”라는 발언으로 충격을 줬다. 그는 성적 대상화 트렌드에 반대한다는 뜻이었으나, 과격한 표현은 논란을 낳았다.


■ 후계 구도와 유산

그는 유언에서 여동생 로잔나, 조카 실바나·로베르타안드레아 카메라나, 그리고 델오르코와 재단이 상속인이 될 것이라 밝혔다. “Armani after Armani” 즉, ‘아르마니 이후의 아르마니’가 지속될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패션업계의 향후 관전 포인트로 남는다.

◆ 용어 설명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대량 생산해 바로 판매하는 기성복을 의미한다.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는 주문 제작되는 최고급 맞춤의상을 지칭한다.

◆ 기자 견해
아르마니의 성공은 ‘심플함의 우아함’이라는 미학을 상품화한 데 있다. 로로 피아나(Loro Piana) 같은 고급 소재 브랜드가 주목받고, Z세대가 ‘고요한 럭셔리’(Quiet Luxury)에 열광하는 오늘, 그의 디자인 철학은 오히려 더 유효하다. 거대 럭셔리 그룹이 인수합병(M&A)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아르마니 그룹의 독립 유지 여부는 향후 글로벌 패션 지형에 변화를 줄 핵심 변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