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부가 자국 최대 민간은행 중 하나인 유니크레딧(UniCredit)의 러시아 국채 보유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며 금융권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재무부 장관은 러시아 주권채권에 대한 투자 노출이 “국제사회가 부과한 대(對)러시아 제재를 위반할 잠재적 소지를 내포한다”고 지적했다.
2025년 7월 30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이 장관은 상원 예산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유니크레딧의 러시아 현지 자회사가 보유한 러시아 연방정부 채권이 제재 리스크를 키운다”며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한 “정부는 국내 금융시스템 안정성과 대외신뢰 확보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은행이 러시아 국채에 과도하게 노출될 경우, 향후 확대될 수 있는 미국·EU의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이탈리아 경제·재무부 장관
‘골든 파워’(Golden Power) 발동 배경
장관은 아울러 유니크레딧이 올 초 추진했던 150억 유로(약 170억 달러) 규모의 중형 은행 방코 BPM(Banco BPM) 인수에 대해 정부가 ‘골든 파워’ 조건을 부과한 것은 “국가 전략 자산 보호”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골든 파워’는 이탈리아가 2012년 제정한 특별 권한으로, 에너지·통신·금융 등 핵심 산업에서 외부 투자나 M&A가 이뤄질 때 정부가 거래를 차단하거나 조건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방코 BPM은 국내 중소기업 대출, 공공 인프라 프로젝트 금융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해당 거래를 백지화한 것은 단순한 간섭이 아닌, 경제 안보 관점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니크레딧은 이달 초 인수 추진 계획을 철회하며 “정부 개입으로 거래 구조가 더 이상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밝혔다.
러시아 채권 투자와 국제 제재의 교차점
유니크레딧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지 사업 축소를 선언했지만, 러시아 법인(UniCredit Bank AO)을 통해 상당 규모의 루블 표시 국채를 계속 보유해 왔다. 국채 매각 시점·매각 방식을 둘러싸고 시장에서는 “서둘러 손절하라”는 요구와 “서둘러 매각할 경우 대규모 평가손을 피할 수 없다”는 우려가 엇갈려 왔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 재무부·중앙은행·국부펀드를 포함한 공공기관과의 신규 금융 거래를 전면 금지했으며, 러시아 주권채권도 거래 제한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서방 은행들은 자칫 제재 위반 판정을 받을 경우, 달러·유로 결제망에서 퇴출되거나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을 가능성이 크다.
시장 반응 및 실무적 함의
이번 발언 직후 밀라노 증시에서 유니크레딧 주가는 장중 한때 2.4% 하락했다가 낙폭을 일부 만회해 1.3% 하락으로 마감했다. 아날리스트들은 “러시아 국채 처분 여부가 향후 배당·자사주 매입 정책에 직결될 수 있다”며 “은행이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① 점진적 포트폴리오 축소, ② 현지법인 매각, ③ 러시아 당국과의 협상” 등으로 분석했다.
특히 ‘점진적 축소’ 전략은 기업·개인 고객 대출 자산을 유지하면서 채권을 만기 도래 시점에 맞춰 자연 소멸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나 해당 국채가 서방 제재 리스트에 추가될 경우 조기 상각(early write-down)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책·법률적 해설
이탈리아의 골든 파워 제도는 본래 외국 자본의 인수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알려져 있지만, 국내 기업 간 거래에도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유럽 내 가장 강력한 방어 규제 중 하나로 평가된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금융·의료·식량안보 산업까지 범위를 확대하면서 발동 빈도가 크게 늘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내부 은행 간 M&A에도 조건을 거는 전례를 만들었다”고 분석하며 “이는 EU 은행통합 정책과 충돌할 소지가 있으므로 브뤼셀과 로마 간 협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향후 전망
단기적으로는 유니크레딧이 러시아 자회사의 총자산 1,000억 루블(약 10억 유로) 규모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최대 화두다. 국채 보유액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20억~25억 유로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유니크레딧 총 자기자본의 약 4%에 해당해 자본비율(Basel Ⅲ)에는 직접적 충격이 제한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과 국제사회 제재 강도가 변수다. 만약 추가 제재가 단행될 경우, 은행은 대손충당금 적립을 늘려야 하고 이는 배당 여력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투자자 관점에서는 리스크 프리미엄이 확대돼 주가 변동성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 용어 설명
• 러시아 주권채권(Sovereign Bonds) : 러시아 연방정부가 발행해 자국·해외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채권. 이자 및 원금 지급이 국가 신용에 의해 보장되나, 제재 대상으로 지정될 경우 유통시장이 사실상 폐쇄된다.
•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 : 제재 대상국과 거래한 제3국 기업·금융기관까지 처벌하는 방식. 미국이 주로 활용한다.
• 골든 파워(Golden Power) : 국가 안보·공공질서를 이유로 M&A를 제한 또는 조건부 승인할 수 있는 이탈리아 정부의 특별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