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은행 M&A 경쟁에서 두각 드러낸 크레디 아그리콜의 ‘거북이 전략’

크레디 아그리콜(Credit Agricole)이탈리아 은행권 재편 국면에서 보여 준 ‘점진적‧협력적 확장 전략’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유럽 주요 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이 각국 정부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프랑스계 대형 은행인 크레디 아그리콜의 사례는 일종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2025년 7월 31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크레디 아그리콜은 지난 20여 년 동안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한 전진’ 방식으로 이탈리아 시장을 공략해 왔다. 그 결과, 현재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제외한 최대 이익 창출처가 됐으며, 2024년 기준 전체 보고 순이익의 15%를 담당한다.

크레디 아그리콜은 Banco BPM의 향방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앞서 유니크레딧(UniCredit)은 정부 반대를 무릅쓰고 Banco BPM 인수를 시도했으나, 로마 정부의 강한 제동으로 무산됐다. 반면 크레디 아그리콜은 비공격적이고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정부와의 신뢰를 구축, ‘숨은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정부 신뢰 얻은 ‘협력형 M&A’

로이터통신이 인용한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와 은행권 소식통에 따르면, 크레디 아그리콜은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도 일관된 파트너십 전략을 펼쳐 ‘신뢰할 만한 외국계 은행’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는 은행가의 국적이 아니라 저축을 모으고 지키며 대출로 연결하는 능력을 본다”라고 지안카를로 조르제티 이탈리아 경제장관이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 2020년 말 이후 크레디 아그리콜 이탈리아 리테일 부문은 고객 대출을 150억 유로 늘렸다. 같은 기간 시장 1위 인테사 산파올로(Intesa Sanpaolo)의 국내 대출은 300억 유로 감소했고, 유니크레딧은 220억 유로 줄어 대조적이다.

유니크레딧은 최근 Banco BPM 인수 의사를 공식 철회했다. 정부가 제시한 조건 탓에 소송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졌고, 경영진은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크레디 아그리콜이 보유한 Banco BPM 지분 19.8%를 매각할 의사가 없었던 점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크레디 아그리콜 SA는 이달 초 유럽중앙은행(ECB)에 Banco BPM 지분을 20% 이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승인을 요청했다. 다만 25%를 넘기면 의무 공개매수(TOB)가 발생하기 때문에, 회사 측은 ‘완전 인수 의도는 없다’며 25% 미만에서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TOB(공개매수) : 일정 지분 이상을 보유하게 되면 모든 주주에게 의무적으로 매수 제안을 해야 한다는 규정.


‘거북이 전략’의 구체적 전개

크레디 아그리콜은 ‘라 방크 베르트(la banque verte, 녹색 은행)’라는 별칭처럼 농업‧지역금융 뿌리를 살려 이탈리아 현지 은행들과 보험·소비자 금융 등 다양한 제휴를 체결했다. 2012년 이후로는 중소형 부실은행 세 곳을 인수해 정상화했고, 2021년에는 북부 부유 지역에 기반을 둔 크레발(Creval)을 무조건적 조건으로 완전 인수했다.

소식통들은 “‘토끼보다 거북이’라는 격언처럼, 크레디 아그리콜은 빠른 지분 확대보다 상업적 시너지에 집중하며 정부와 ‘윈윈’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정치 지형이 바뀌어도 은행의 전략은 흔들리지 않았다는 평가다.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 간에 이민·안보·시민권 등 여러 현안으로 긴장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크레디 아그리콜은 ‘금융 협력’이라는 실질적 이익에 초점을 맞춰 외교적 갈등의 파고를 피해 왔다.

최근 Banco BPM이 유사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은행과의 제휴 가능성을 검토한다고 밝히면서, 크레디 아그리콜은 확대 지분을 통해 ‘상업적 파트너십 보호’라는 목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됐다.


관료 리스크 최소화…“시간은 우리 편”

과거 크레디 아그리콜 자문을 맡았던 인사는 “

정권은 바뀌어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동일한 기업문화와 인력으로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고 말했다. 지속적 리더십과 장기 관점이 이탈리아 시장 확대의 열쇠였다는 설명이다.

달러-유로 환율은 1달러당 0.8740유로다.2025년 7월 31일 기준


용어 해설 및 추가 정보

ECB(유럽중앙은행) : 유로존 20개국의 통화정책을 담당하며, 은행 건전성 감독 권한도 보유하고 있다.

지분 25% 의무 공개매수 규정 : 이탈리아 및 EU 금융규제에 따라, 특정 기업 지분이 25%를 넘으면 나머지 주주에게 동일한 가격으로 주식을 사들일 의무가 발생해 사실상 ‘적대적 M&A’로 간주된다.

위 사례처럼 외국계 은행이 이탈리아 금융권 내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정부·규제기관·정치권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크레디 아그리콜의 ‘점진적 접근법’은 이러한 복합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으로, ‘은행 M&A 분야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