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매 물가가 다시 가팔라지고 있다. 식료품 가격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비(非)식품 부문의 하락세가 사실상 멈춰 서면서 전반적인 물가 압력이 확대됐다는 분석이다.
2025년 9월 29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올 9월 영국 British Retail Consortium(BRC·영국소매업협회)이 집계한 소매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1.4% 상승해 8월의 0.9%에서 큰 폭으로 올라섰다. 이는 2024년 2월 이후 가장 빠른 상승률이다.
BRC 지수는 슈퍼마켓·백화점·전자제품점 등 다양한 오프라인 및 온라인 소매업체의 가격 동향을 반영한다. 이 지수는 영국 통계청(ONS)이 산출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보다 범위가 좁지만, 소매 현장의 체감 물가를 선행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금융시장과 정책 당국이 주목한다.
식료품·비식료품 가격 동향
세부적으로 보면, 식료품 가격은 전년 동월 대비 4.2% 상승해 전달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반면 비식료품 가격은 0.1% 하락에 그치며 8월에 기록한 –0.8%보다 낙폭이 크게 줄었다. 업계는 “비식료품 부문의 가격 할인 국면이 사실상 끝물에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BRC 헬렌 디킨슨(Helen Dickinson) 최고경영자(CEO)는 “가계는 쇼핑 비용이 갈수록 부담스러워지고 있다”면서 “글로벌 공급망 변수, 국내 국민보험(National Insurance) 증가, 인건비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가격에 전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보험National Insurance는 영국 기업이 직원 급여에 대해 부담하는 사회보장성 세목으로, 한국의 4대 보험료와 유사한 개념이다. 레이철 리브스(Rachel Reeves) 재무장관은 지난해 예산안에서 기업 부담분을 인상했고, 이에 소매업계는 “추가 비용이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재정·통화 정책 변수
BRC는 오는 11월 발표될 차기 예산안에서 리브스 장관이 추가 세금·부담금 인상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했다. “새로운 부담금이 도입될 경우 소비자 물가를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논리다.
영란은행(BoE)은 BRC보다 범주가 넓은 공식 CPI가 8월 3.8%에서 9월에는 4.0%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중앙은행 목표치(2%)의 두 배 수준이다. 통화정책위원회(MPC) 내부에서는 고용 시장 둔화가 물가 안정을 회복하기에 충분한지, 혹은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춰야 하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데이브 램즈던(Dave Ramsden) 부총재는 전날(28일) 연설에서 “식료품 가격이 일반 국민의 ‘체감 인플레이션’에 비정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22년 식료품 급등이 일상 품목에 대한 가격 민감도를 높여, 경제 전반의 인플레이션 심리를 자극한다고 분석했다.
세부 품목: 유제품·쇠고기·포장재 부담
BRC 보고서는 유제품과 쇠고기 가격이 특히 큰 폭으로 뛰었다고 밝혔다. 이는 농가의 에너지·노동비 증가를 일차 요인으로 꼽는다. 아울러 10월부터 시행되는 정부의 신규 ‘포장세(packaging levy)’가 식품 제조·유통 비용을 자극해 추가 인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포장세는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플라스틱·유리·금속 포장재에 일괄 과세하는 제도로, 기업이 그 부담을 제품 가격에 전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10월 이후 식료품 물가가 한 단계 더 상승할 것이란 관측이 고개를 든다.
전문가 시각 및 향후 전망
시장 전문가들은 영국 인플레이션의 ‘끈적거림’을 지적한다. BRC 지표는 범위가 제한적이지만, 소비 습관과 직결되는 식료품 가격이 오름세를 지속하는 한 CPI 둔화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또한 브렉시트 후 무역 마찰, 파운드화 약세 등 구조적 요인도 수입 비용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다층적 압력 때문에 영란은행이 내년 상반기까지 금리를 ‘긴축적’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인하 속도를 늦출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기자 해설: 필자는 물가 구조가 ‘서비스·임금→재화 가격→기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2차 파급 효과에 주목한다. 임금 인상→가계 지출 확대→가격 전가의 고리가 지속되면 목표치로의 복귀가 장기화될 수 있다. 정부가 세금·부담금 인상을 자제하더라도, 이미 누적된 비용 압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비재 기업은 높은 원가를 빠르게 소비자에게 반영하는 ‘스텔스 가격 인상(shrinkflation 포함)’ 전략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정책의 핵심은 공급 측 비용 안정과 수요 측 인플레이션 기대 관리라는 두 축으로 모아진다. 에너지 비용 억제, 노동시장 재교육, 무역 장벽 완화 등 중·장기 처방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올겨울 에너지 수요 증대, 중동·우크라이나 지정학 리스크, 글로벌 물류 차질 등이 겹칠 경우 영국 내 물가 정점이 재차 연장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투자자와 소비자 모두 가격 변동성에 대비한 위험 관리가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