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브라스 시스템즈의 목요일 데뷔는 단순히 기술주 역사상 최대급 기업공개(IPO)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데 그치지 않았다. 이는 엔비디아의 고가이면서도 품귀 현상을 빚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칩 수요가 거침없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2026년 5월 15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세레브라스는 월가 첫 거래일을 마감할 때 시가총액이 1,000억달러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까지 치솟으며,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와 알리바바처럼 장을 끝냈을 때 1,000억달러를 웃돈 소수의 기업 대열에 근접했다. 그러나 첫 정규 거래일인 금요일에는 주가가 10% 하락했다.
세레브라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엔비디아의 전통적 GPU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칩을 만든다는 점 때문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칩은 식탁 크기에 가깝다고 묘사되며, 세레브라스의 최고경영자(CEO)이자 공동창업자인 앤드루 펠드먼은 CNBC의 스쿼크 박스에서 “우리는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큰 칩을 만든다”며 “큰 칩은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빠르게 결과를 낸다”고 말했다.
그동안 엔비디아가 인공지능 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온 배경에는 GPU가 대규모 모델 학습에 필요한 병렬 연산에 강한 범용 작업용 칩으로 활용돼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업계는 에이전틱 AI 시대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 단계에서는 추론(inference)이 핵심이 된다. 추론은 대규모 데이터에서 패턴을 배우는 학습(training)과 달리,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AI가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일반 독자에게 쉽게 설명하면, 학습이 ‘공부’라면 추론은 ‘시험을 치르며 답을 내는 단계’에 가깝다.
이런 추론 작업은 반드시 최고성능 칩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세레브라스의 WSE-3처럼 특정 작업에 맞춰 설계된 비교적 덜 강력한 칩에서도 수행될 수 있다. WSE-3는 애플리케이션 특화 집적회로(ASIC) 범주에 속한다. ASIC은 특정 용도에 맞게 설계된 반도체로, 범용 칩보다 효율적일 수 있지만 활용 범위는 제한적이다. 이 시장은 점점 더 혼잡해지고 있으며, 구글,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자체 ASIC을 개발하고 있다.
세레브라스는 WSE-3가 최대 GPU보다 57배 크고, 트랜지스터 수는 50배 많다고 밝혔다. 트랜지스터는 전자회로의 기본 구성 요소로, 칩의 성능과 집적도를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다. 세레브라스는 또 자사 칩이 대만반도체제조(TSMC)의 5나노미터 공정으로 생산된다고 설명했다. 최첨단 AI 칩은 현재 TSMC의 2나노미터 공정이 사용되지만, 이는 현재로서는 대만에서만 가능하다.
2016년 실리콘밸리에서 설립된 세레브라스는 2024년 처음 상장을 신청했으나, 아랍에미리트(UAE)의 마이크로소프트 지원 AI 기업 G42 한 곳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논란이 되면서 신청을 철회했다. 당시 이 회사는 단일 고객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에서 심사를 받았다.
이번 상장 성공으로 펠드먼 CEO와 하드웨어 기술 책임자 숀 리는 보유 지분 가치만으로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세레브라스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하다.
세레브라스는 오랫동안 기업 고객에 칩을 판매하는 데 집중해 왔지만, 현재는 자사 데이터센터에서 칩을 직접 운영해 클라우드 서비스로 제공하는 방식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레브라스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코어위브 같은 클라우드 사업자들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클라우드는 여러 기업이 인터넷을 통해 AI 연산 자원을 빌려 쓰는 서비스로, 대규모 AI 모델 운영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세레브라스와 오픈AI는 2028년까지 유효한 200억달러 규모의 클라우드 계약을 2026년 1월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아마존웹서비스(AWS)도 3월 자사 데이터센터에 세레브라스 칩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세레브라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 밥 코민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빠른 추론 제품에 대한 수요가 너무 커서 가장 큰 과제는 사실 공급”이라며 “가능한 한 제조와 데이터센터 용량을 계속 늘리고 있지만, 여전히 2027년까지 완판된 상태”라고 말했다.
하이퍼스케일러, 즉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들은 자체 ASIC을 만들고 있지만, 세레브라스는 이보다는 다른 기업을 위해 ASIC을 설계·제조하는 업체들과 더 직접적으로 경쟁한다. 대표적인 경쟁사는 그록(Groq)이다. 엔비디아는 12월 Groq의 기술을 200억달러에 인수한 데 이어, 3월 GTC 행사에서 커스텀 Groq 언어처리장치(LPU)를 발표했다. LPU는 대규모 언어모델 처리에 특화된 칩을 뜻한다.
그 밖에도 삼바노바(SambaNova)와 D-매트릭스가 세레브라스의 주목할 만한 경쟁사로 꼽힌다. 삼바노바는 휴깅페이스와 메타를 고객으로 두고 있으며, 인텔은 2월 삼바노바의 3억5,000만달러 규모 자금조달에 참여했다. 인텔의 립부 탄 CEO는 2017년부터 삼바노바 이사회 의장을 맡아왔다.
세레브라스의 IPO는 리벨리온스(Rebellions) 같은 다른 커스텀 ASIC 스타트업의 상장 가능성도 열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국의 이 칩 업체는 3월 삼성 등을 포함한 투자자들로부터 4억달러를 조달했으며, 기업가치는 23억4,000만달러로 평가됐다. 이후 상장을 준비 중이다.
시장 관점에서 보면 세레브라스의 급부상은 AI 칩 시장이 엔비디아 GPU 중심에서 ASIC과 추론 특화 칩 중심으로 다변화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세레브라스는 아직 생산 능력과 데이터센터 용량 확대라는 과제를 안고 있으며, 실제로 2027년까지 수요가 공급을 앞서고 있어 단기적으로는 매출 성장 기대가 높다. 반면 경쟁사들의 자체 칩 개발과 대형 클라우드 사업자들의 내재화가 빠르게 진행될 경우, 향후 가격 경쟁과 마진 압박이 심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IPO 성공은 AI 인프라 투자 열기가 여전히 강하다는 점을 재확인시켰고, 관련 종목과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울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