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시스템즈, 헬스케어 AI 혁신의 현주소를 제시하다
미국 위스콘신주 베로나에 위치한 에픽 시스템즈(Epic Systems)의 1,670에이커(약 677만 ㎡) 규모 캠퍼스에서 열린 연례 사용자 그룹 미팅(UGM 2025) 현장은 우주선,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AI)을 테마로 꾸며지며 미래 의료 기술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2025년 8월 20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에픽 시스템즈는 이날 행사에서 환자·의료진·보험사를 위한 200여 개의 AI 기능을 개발 중이라고 발표했다. 82세 최고경영자(CEO) 주디 포크너(Judy Faulkner)는 보라색 가발과 형광 녹색 신발, 무지갯빛 조끼를 착용해 영화 ‘토이 스토리’ 속 버즈 라이트이어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다.
포크너 CEO는 1만1,400석 규모의 지하 강당을 가득 메운 글로벌 보건의료 경영진들에게 “
우리는 인간의 지능과 호기심을 생성형 AI(gen AI)의 탐구 능력과 결합해 나가고 있다
”고 강조했다.
전자건강기록(EHR) 선도 기업의 AI 전략
전자건강기록(Electronic Health Record, EHR)은 환자의 진료·검사·투약 내역을 의료진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해 공유하는 디지털 의료 차트다. 미국 의료 시스템에서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았으며, 에픽은 Oracle Health(구 써너)와 경쟁하고 있다. 회사 측에 따르면 현재 미국인 2억8,000만 명이 에픽의 EHR을 이용하고 있다.
대다수 환자에게 익숙한 사용자 포털 ‘마이차트(MyChart)’도 에픽의 대표 서비스다. 에픽은 지난주 ‘마이차트 센트럴(MyChart Central)’을 공개하며, 여러 의료기관에 각각 로그인해야 하는 불편을 단일 자격 증명으로 해결한다고 밝혔다. 포크너 CEO는 “환자 문의 대응과 비밀번호 재설정에 드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며 의료기관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에픽의 세 AI 어시스턴트—‘Emmie·Art·Penny’
올해 행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발표는 상시 대화형 AI 비서 ‘Emmie’다. 마이차트 내에 탑재되는 Emmie는 검사 결과 해석, 진료 예약 제안, 개인 맞춤 검진 추천을 24시간 제공한다.
다음으로 ‘Art’는 임상의 전용 AI 동료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 Art는 의사가 필요로 할 혈압 추세·가족력·처방전 등을 선제적으로 호출한다. 가장 큰 화제는 AI 기반 임상 노트 초안 작성(소위 ‘AI 스크라이브’) 기능이다. *AI 스크라이브란? 진료 중 녹음된 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정리해 문서화함으로써 의사의 문서 업무 부담을 줄이는 솔루션.
에픽은 해당 기능을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공동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DAX Copilot이 이미 AI 스크라이브 시장에서 인기 제품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양사는 20년 넘게 협업해온 파트너십을 강화한다.
“에픽의 새로운 AI 차팅 기능에 ‘드래곤(Dragon) 앰비언트 AI 기술’을 접목해 진료 품질을 더 높이겠다.” – 마이크로소프트 헬스&라이프사이언스 부문 부사장 조 페트로(Joe Petro)
‘Penny’는 수익 사이클·행정 업무 지원을 목표로 한다. 보험 청구 거절 시 항소 서한을 자동 생성하고, 의료 코딩 제안을 통해 코딩 속도를 높여 이미 의료기관 현장에 적용됐다.
거대 데이터셋 ‘Cosmos’와 차세대 모델 ‘Cosmos AI’
에픽은 비식별화 환자 데이터베이스 ‘Cosmos’를 기반으로 자체 사전학습(FM) 모델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Cosmos는 1,760개 병원, 3억 명 환자, 80억 건 진료 기록을 보유하며, 연구자들은 특정 조건에 동의해 접근할 수 있다.
세스 헤인(Seth Hain) 연구·개발 수석부사장은 “현재 80억 건의 임상 사례만 학습했음에도 모델 정확도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며 “재입원 위험·심근경색 가능성 등 환자별 의료 이벤트 발생 시점 예측에 활용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분석 및 시장 전망
국내외 의료계는 전자건강기록 통합과 생성형 AI의 결합을 차세대 디지털 헬스 핵심 축으로 보고 있다. 에픽의 AI 비서는 사용성을 기준으로 환자(Emmie)·의료진(Art)·행정(Penny)을 명확히 구분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과거 일괄형 소프트웨어에서 역할 기반(persona-based) UX로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AI 스크라이브는 의사 1인당 평균 2시간가량의 문서 시간을 절감하며 번아웃 감소와 환자 대면 시간 증대에 기여할 것으로 관측된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2027년까지 미국 병원의 70% 이상이 AI 기반 문서화 도구를 도입할 것으로 추정한다*기관 추정치.
그러나 환자 개인정보 보호, AI 오·의존 위험 등 과제가 산적하다. 미국 HIPAA(건강보험 이동성과 책임에 관한 법)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고도화된 분석을 수행해야 하며, 데이터 편향을 최소화하려면 다양한 인구통계학적 표본을 포함한 지속적 학습이 필수다.
국내 의료기관도 EMR(전자의무기록) 글로벌 표준화와 AI 임상 적용을 가속화하고 있어, 에픽·마이크로소프트와 유사한 산·학·의 협력 모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용어 설명
EHR vs. EMR: EMR(Electronic Medical Record)은 단일 의료기관 내부 기록을 의미하는 반면, EHR은 여러 기관을 아우르며 국가 표준에 따라 상호운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확장형 의료 기록 시스템이다.
AI 스크라이브(AI Scribe): 의사가 진료 중 구두로 설명하는 내용을 음성 인식·자연어 처리 기술로 실시간 기록해 진료노트 초안을 생성하는 서비스. 문서 작업에 쓰이던 시간을 절감하고, 보험 청구용 문서 정확성을 높여준다.
Revenue Cycle Management(RCM): 의료기관의 진료·청구·수납·추심·통계 전 과정을 관리하는 행정 프로세스로, 수익성 확보와 납부 지연 리스크 관리에 핵심이다.
마지막 한마디
에픽 시스템즈의 이번 발표는 “의료 데이터를 선제적으로 해석해 실질적 임상 활동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AI”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를 맞아 환자와 의료진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편의성을 제공할 수 있을지, 내년 실제 배포 과정에서 그 성과가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