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제조업을 짓누르는 ‘이중 비용’ 압박
영국 대표 석유화학 기업 Ineos(이네오스)가 자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치솟는 에너지·탄소 배출 비용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회사 측은 이메일 성명을 통해 “향후 1~2년 내 에너지 및 탄소 비용 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영국 제조업 전체가 붕괴될 수 있다”라는 내용의 입장을 내놨다.
2025년 8월 12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이네오스는 특히 자사가 보유한 그레인머스(Grangemouth) 화학 콤플렉스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현실은 냉혹하다”고 토로했다. 이 시설은 영국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 단지로, 1970년대 말부터 영국 화학 산업을 지탱해 온 핵심 거점으로 꼽힌다.
이번 경고는 텔레그래프(Telegraph) 지가 해당 단지가 폐쇄 위기에 놓였다고 단독 보도한 직후 나왔다. 이네오스는 보도 내용을 공식 확인하며 “글로벌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천연가스 및 탄소 배출 비용이 과도하게 높다”고 지적했다.
❚ 영국과 해외 공장의 비용 격차
이네오스는 천연가스 가격과 탄소배출권 가격이 각각 해외 대비 2~3배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동일한 공정을 운영해도 원가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져, 영국 현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시장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된다는 논리다.
“그레인머스 공장은 가스·탄소 비용이라는 ‘이중 족쇄’에 묶여 있다.” — 이네오스 성명 중
실제 영국 정부가 2021년 말 도입한 ‘탄소가격지원제(Carbon Price Support, CPS)’는 EU 배출권거래제(EU ETS)보다 높은 수준의 가격 신호를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스 공급망이 불안정해지면서 국제 가스 선물가가 급등, 영국 산업체의 부담은 가중됐다.
❚ 생산 중단 전례와 구조적 한계
이네오스는 이미 2025년 초 그레인머스 내 정유 부문을 중단한 바 있다. 회사 측은 “정유 마진이 감소하고 정치·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지속 운용이 불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화학 부문까지 위협받게 되면서 지역 경제와 일자리에 미칠 충격이 클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그레인머스 단지는 스코틀랜드 파이프(Grangemouth, Falkirk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약 2,000명(직·간접 고용 포함)의 근로자가 종사한다. 해당 단지가 문을 닫을 경우 영국 화학 원료 수급 체계 전반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 전문가 시각·정책 과제
산업분석기관 CRU 그룹은 “영국은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LNG(액화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은데, 스팟시장의 변동성을 그대로 제조업이 떠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한 배출권 가격이 높아질수록 화학·철강·시멘트 등 탄소집약 산업이 국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할 가능성도 커진다.
영국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70% 이상으로 확대하고, 탄소감축 투자세액공제(ITC)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업계는 “세부 설계와 지원 규모가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EU, 미국·캐나다 등은 보조금 및 전력요금 할인을 통해 자국 중화학 공장을 방어하고 있다.
국내 정책연구소 Institute for Energy Economics는 영국 사례를 두고 “탈탄소 전환과 산업경쟁력 유지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정교한 정책 믹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용어 풀이
탄소가격지원제(CPS)란? — 영국 정부가 발전·산업 부문 배출권 가격에 추가로 부과하는 세금 형태의 제도다. EU ETS 가격에 덧붙여진다는 점에서 ‘탄소 이중 가격’으로도 불린다.
배출권거래제(ETS)란? — 국가(또는 지역)별로 설정한 총 배출 한도 내에서 기업 간 배출권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해, 시장기제를 통해 감축 비용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제도다.
LNG란? — 천연가스를 영하 162°C 이하에서 액화한 연료로, 부피가 1/600으로 줄어들어 장거리 수송이 용이하다. 영국은 북해가스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LNG 수입 의존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 기자 해설: “탈탄소와 산업생존의 갈림길”
영국 산업계는 정부의 기후 공약을 지지하면서도, 속도·비용 분담 측면에서 ‘전환의 정의’가 훼손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독일·프랑스가 제조업 보호를 위한 전력요금 캡(cap)을 도입하는 동안, 영국은 고가의 도매가격을 그대로 산업용에 전가해 왔다.
이네오스의 위기 언급은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선진국 기후정책과 산업정책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정부가 구조적 대응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다른 탄소집약 업종에서도 ‘엑소더스(탈출)’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 결론
이네오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영국 제조업의 존립은 비용 구조를 낮추는 정책적 ‘결단’에 달려 있다.” 2030년 넷제로 달성을 향한 긴 여정에서, 영국 정부가 산업경쟁력·에너지안보·기후리스크라는 삼중 과제를 어떻게 균형 있게 풀어낼지가 향후 국제 산업지형을 가늠할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