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달러, 아시아판 ‘스위스 프랑’ 되나…안전자산 기능 부각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확실성에 휩싸일 때마다 투자자들은 금(gold)과 미국 국채(Treasuries) 그리고 일본 엔화·미국 달러·스위스 프랑과 같은 안전통화(safe-haven currency)로 몰린다. 이들 자산은 시장 변동성이 커질수록 가치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상승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21일, CNBC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전통적 안전통화인 달러와 엔화, 프랑이 각종 악재로 흔들리는 사이 싱가포르 달러(SGD)가 ‘제4의 안전통화’ 후보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달러지수가 연초 대비 9% 이상 하락하고, 엔화 역시 무역 불확실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싱가포르 달러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싱가포르 최대 은행 OCBC의 외환 전략가 크리스토퍼 웡(Christopher Wong)은 “싱가포르 달러는 이미 아시아와 신흥시장 내에서 ‘준(準) 안전통화(quasi safe-haven)’로 기능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달러·엔화·스위스 프랑처럼 세계적 위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아시아 중심의 금융 스트레스가 발생할 때 방어적 특성을 보여 왔다“고 강조했다.

SGD performance chart

실제 SGD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약 6% 상승했다. 투자은행 제프리스(Jefferies)는

“향후 5년 안에 SGD가 달러와 1 대 1(패리티·parity) 수준까지 강세를 보일 수 있다”

고 전망했다.

● 싱가포르 달러가 가진 튼튼한 ‘기초 체력’

핀브리지 인베스트먼트(PineBridge Investments)의 아시아 채권 공동 대표 오마르 슬림(Omar Slim)은 “견고한 제도적 기반, 재정건전성, 정책 일관성이 SGD를 안전통화 후보로 만든다”고 평가했다. VP뱅크(VP Bank)의 최고투자책임자(CIO) 펠릭스 브릴(Felix Brill) 역시 “싱가포르 달러는 거시경제 안정성,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2024년 기준 GDP의 178.8%), 낮은 정치적 위험 등 현대적 안전통화의 요건을 고루 갖췄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통화정책은 독특하다. 대부분 국가가 기준금리로 자국 통화를 조정하지만, 싱가포르는 주요 교역상대국 통화 바스켓 대비 SGD의 환율 밴드를 설정해 ‘기울기·중간값·폭’을 관리한다. (정확한 밴드 수치는 공개되지 않는다.) 스미토모미쓰이은행(SMBC)의 제프 응(Jeff Ng) 아시아 거시전략 총괄은 “환율 밴드 폭이 약 4%로 추정된다”며 “이 같은 관리 체계가 단기 변동성을 낮추고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SGD band chart

● 해결해야 할 세 가지 ‘허들’

첫째, 시장 규모의 한계다. 국제결제은행(BIS)이 2022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달러는 전 세계 외환 거래의 88%를 차지했지만, 엔화는 17%, 스위스 프랑은 5%, 싱가포르 달러는 2%에 그쳤다. 브릴 CIO는 “싱가포르는 높은 신뢰를 얻고 있지만 경제 규모가 작아 엔화·프랑만큼의 거래량과 채권시장 깊이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둘째, 통화관리 방식의 ‘양날의 검’이다. 환율 밴드 정책은 투기적 포지션과 대규모 베팅을 억제해 변동성을 줄이지만, 동시에 유동성과 시장 깊이를 제한해 글로벌 안전통화로서의 관문을 좁힌다. 브릴 CIO는 “신뢰도를 높여 주지만 스케일 확장에는 장애물“이라고 평가했다.

셋째, 수출 의존형 경제 구조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4년 싱가포르의 수출액은 GDP의 178.8%를 차지한다. 나틱시스(Natixis)의 선임 이코노미스트 트린 응우옌(Trinh Nguyen)은 “투자자들이 SGD 자산을 과도하게 사들이면 통화가치가 급등해 수출경쟁력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싱가포르통화청(MAS)은 과도한 절상(切上)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포트폴리오 3번째 축’으로 주목

뱅크오브싱가포르(Bank of Singapore)의 글로벌 CIO 진 치아(Jean Chia)는 “SGD는 통화 다변화 전략에서 ‘세 번째 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싱가포르 달러가 엔화·달러·프랑에 버금가는 지위를 점차 획득할 잠재력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줄리어스베어(Julius Baer)의 아시아 담당 연구원 젠아이 추아(Jen-Ai Chua)는 “SGD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안전통화로 진화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브릴 CIO도 “안전통화 지위는 수십 년간의 위기 대응 이력을 통해 형성된다”며 “SGD가 아시아 위기 국면에서는 강세를 보였지만, 전 세계적 경기 침체 때 ‘최초 대피처’로 선택되진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는 “국제적 사용 확대, 현지 금융시장 접근성 개선, 지속적 환율 안정이 축적되면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마르 슬림 역시 “

전통적 안전통화의 매력이 훼손된 현 시점에서 세계는 새로운 피난처를 찾고 있다. SGD는 그 목록 상단에 오를 것

“이라며 “USD·JPY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시아판 스위스 프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용어 설명

  • 안전통화(Safe-haven currency): 지정학·경제 위기 때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통화. 변동성이 낮고 자국의 제도·재정이 튼튼해 가치 보존 가능성이 높다.
  • 패리티(Parity): 두 통화의 환율이 1:1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 국제결제은행(BIS): 전 세계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며, 3년마다 주요 통화의 거래 비중을 조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