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고등법원이 스탠다드차타드은행(Standard Chartered Bank)을 상대로 한 약 27억 달러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계속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법원은 청산인들이 제기한 소송을 각하(일명 strike out)해 달라는 은행 측 신청을 기각했으며, 이는 1MDB(말레이시아 국부펀드) 관련 사기 의혹에서 자금 회수를 시도하는 절차에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5년 11월 24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고등법원은 스탠다드차타드의 소송 각하 신청을 기각했다. 청산인 측은 보도 자료에서 이번 결정을 “사건이 계속 진행될 수 있게 하는 중대한 법적 승리”라고 표현하며, 본안 심리로의 진행이 책임 규명과 자산 환수의 동력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청산인들은 6월 싱가포르에서 스탠다드차타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은행이 10여 년 전의 거래에서 사기 행위가 이뤄지도록 행위를 가능케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그 결과 27억 달러가 넘는 재정적 손실이 발생했다. 청산인들은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We are pleased that this application has been dismissed. It also enables us to continue the work of recovering misappropriated assets that rightfully belong to the people of Malaysia.”
이번 조치는 1Malaysia Development Berhad(1MDB)에서 유출됐다고 의심되는 자금을 세계 곳곳에서 추적·회수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의 연장선에 있다. 미국 수사 당국은 2009년부터 2014년 사이 복잡하고 범세계적으로 전개된 계획을 통해 약 45억 달러가 1MDB에서 탈취됐다고 밝힌 바 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은행 대변인은 “Standard Chartered disagrees with the decision and will be filing an appeal”이라고 전하며, 항소 계획을 예고했다. 은행은 앞서 7월에도 청산인들의 주장을 강력히 부인(emphatically rejected)한다고 밝힌 바 있다.
청산인들이 관리하는 1MDB 관련 청산 대상 3개 법인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스탠다드차타드 내부에서 이루어진 100건이 넘는 인트라뱅크(동일 은행 내) 이체가 도난 자금의 흐름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은행이 자금 이체와 관련한 명백한 경고 신호(red flags)를 묵과해 결과적으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청산인들은 스탠다드차타드 계좌를 통해 흘러간 자금에는 말레이시아 전 총리 나집 라작(Najib Razak)의 개인 은행 계좌로의 이체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나집은 1MDB와 연계된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현재 징역 6년을 복역 중이다.
최소 6개국이 관련 거래를 조사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싱가포르와 스위스가 포함된다. 글로벌 수사는 세계 곳곳의 고위 관료와 은행가들을 연루시키며 확대돼 왔고, 여기에는 나집과 함께 미국 은행 골드만삭스의 일부 임원들도 포함돼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난해, 2019년부터 2024년 2월까지 1MDB 관련 자산에서 총 290억 링깃($7.01 billion)을 회수했다고 밝혔다. 이는 장기간의 국제 공조와 민사·형사 절차가 결합된 결과물로, 향후 추가 회수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동시에 높이고 있다.
한편 2016년에는 싱가포르 중앙은행(통화청, MAS)이 1MDB 스캔들과 관련된 자금세탁 방지 위반을 이유로 스탠다드차타드 싱가포르 법인에 S$5.2백만의 제재를 부과했다. 이는 싱가포르 당국이 당시 일련의 은행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광범위한 금융감독 조치의 일환이었다.
환율 참고1: $1 = 4.1390 링깃(보도 시점 기준).
해설: 법적 절차와 핵심 용어 정리
소송 각하(strike out)는 피고가 소장을 형식 또는 법리상 결함을 이유로 본안 심리 없이 배척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절차다. 법원이 각하 신청을 기각했다는 것은, 원고의 주장이 형식적·법리적 문턱을 넘었다고 보아 증거조사와 본안 판단 단계로 진행시키겠다는 의미다. 이는 책임 인정이나 배상 명령이 내려졌다는 뜻은 아니며, 향후 심리에서 사실관계와 법적 책임이 본격적으로 다뤄지게 됨을 의미한다.
인트라뱅크 이체(intrabank transfer)는 같은 은행 내 계좌 간 자금 이동을 가리킨다. 금융범죄 맥락에서 이러한 이체는 외부 결제망을 거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흔적이 덜 남는다는 점 때문에, 다른 통제 장치와 결합하지 않으면 자금세탁 방지(AML) 감시에 취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청산인들의 주장은 이러한 특성을 근거로 은행의 모니터링 의무와 경고 신호 대응이 충분했는지를 문제 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인 1MDB는 정부가 보유한 자금을 기반으로 투자·개발 프로젝트에 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기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공적 자금이 해외 법인·계좌를 포함한 복잡한 경로를 통해 유출됐다는 의혹이며, 그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내부통제와 준법감시가 적정했는지 여부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한다.
의미와 전망: 금융 규제·소송 리스크의 재부상
이번 결정은 싱가포르 사법부가 금융범죄 관련 민사 책임을 둘러싼 쟁점을 본안에서 정면으로 다루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다국적 은행을 상대로 한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가 초기 절차적 문턱을 넘겼다는 점은, 향후 광범위한 증거개시(discovery)와 내부통제 실무에 대한 정밀 검증이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은행권 전반에 걸쳐 거래 모니터링, 고위험 고객 심사(KYC), 비정상 거래탐지 등 컴플라이언스 체계를 재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각하 신청 기각은 책임 확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탠다드차타드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상급심 판단에 따라 절차가 추가로 길어질 수 있다. 또한 본안 심리에서는 구체적 거래 흐름, 리스크 경고의 성격과 수준, 당시의 규제 기준과 내부 정책 등이 종합적으로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법원의 최종 판단은 개별 사실관계와 법리 적용에 좌우될 것이며, 그 결과는 유사 사안에 대한 사례법적 기준 형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국가 간 자산 회수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번 사건은 이미 다수 국가가 병행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초국경 금융범죄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준다. 싱가포르와 스위스를 포함한 최소 6개국이 1MDB 거래를 조사 중이라는 사실은, 규제당국 간 정보공유와 공조가 신속한 계좌 동결·압류 및 환수 합의로 이어질 가능성을 시사한다. 말레이시아가 2019년부터 2024년 2월까지 290억 링깃(약 70억 1천만 달러)을 회수했다고 밝힌 점은 국제 공조의 실효성을 뒷받침한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1MDB 사안이 레거시 리스크에서 지속적 소송·규제 리스크로 재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거래가 현재의 책임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은, 거버넌스와 기록관리, 경고 신호 대응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한다. 동시에 은행은 내부 통제 강화와 감사 트레일 확보를 통해, 추후 소송에서의 방어 가능성을 높이는 노력이 요구된다.
요약하면, 이번 결정은 싱가포르 고등법원이 1MDB 관련 쟁점을 본안에서 심리할 수 있도록 문을 연 사건으로, 스탠다드차타드의 항소와 향후 심리 결과가 주목된다. 글로벌 차원의 조사와 자산 회수가 계속되는 가운데, 본 사안은 은행권의 자금세탁 방지·고객확인 체계가 실무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법적 기준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1 환율 표시는 기사 말미 제공 수치($1 = 4.1390 링깃)를 인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