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의 차기 예산안이 수십 년 만에 가장 정치적으로 난해한 국면을 맞고 있다. 투자은행 스티펠(Stifel)은 이번 예산이 2024년 총선 공약의 제약 속에서 확대되는 재정 공백을 메워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지난해 복지 지출을 억제하려던 시도가 보수당 하원의원들의 반발로 좌초되면서, 정부는 또다시 세수 확충을 위해 증세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는 분석이다.
2025년 11월 21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조정에 실패한 여파로 장관들은 이전 예산에서 실시된 410억 5,000만 파운드(£41.5bn) 규모의 세금 인상에 맞먹는 추가 증세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단순한 세율 손질을 넘어 세제 전반의 구조적 조정 논의로 확산될 여지를 시사한다.
노동당의 총선 공약은 또 다른 제약 요인이다. 소득세, 국민보험(National Insurance), 부가가치세(VAT), 법인세 등 이른바 네 가지 헤드라인 세율 동결을 약속한 바 있다. 이 네 축은 전체 조세 수입의 대략 3분의 2를 차지하는 만큼, 다른 영역에서 세원을 찾을 수 있는 폭은 좁다. 즉, 명시적 세율 인상이 아닌 과세 표준·공제·한도 등 간접적 경로를 통한 실질 증세가 부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같은 맥락에서 레이철 리브스(Rachel Reeves) 재무장관은 최근 몇 주간 “소득세율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으로 여론의 반응을 시험했다가, 곧바로 이를 철회하고 당의 금지선(red lines)을 재확인했다. 정치적 유연성과 정책 신뢰 사이의 복잡한 균형 문제가 표면화한 셈이다.
스티펠 리서치팀(리드 애널리스트 존 카힐(John Cahill))은 이 상황을 두고 1988년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세금은 없다(no new taxes)” 공약과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당시 부시는 공약을 뒤집은 대가를 정치적으로 치렀고, 이는 공약의 상징적 무게가 정책 실행의 공간을 크게 제약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고 평가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번 예산안의 본질은 결국
“어떤 어깨가 가장 넓은지, 곧 누가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될지”
를 가르는 선택의 문제로 압축된다. 스티펠은 주요 영국 업종을 대상으로 세제 옵션별 잠재 영향도를 저·중·고 위험으로 분류해 지도를 그렸으며, 정책 변경에 대한 업종별 노출도를 체계적으로 비교했다.
검토 중인 조치는 폭넓다. 소득세 과표·공제·구간 임계값(threshold) 조정, 자본이득세(CGT), 상속세(IHT) 조정, 비즈니스 레이트(사업장 재산세), 윈드폴세(초과이윤세), 연금 제도 변경, ISA(개인저축계좌) 개편, 최저임금 인상, 그리고 영국판 ‘엑시트 택스(exit tax)’ 도입이 거론된다. 이러한 수단은 각기 세수 확보력과 성장·투자에 대한 파급효과가 상이해, 조합의 방식에 따라 시장 반응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스티펠의 분석에 따르면, 영향은 불균등하게 나타난다. 투자펀드, 건자재, 펍(pub), 비즈니스 서비스, 주택건설, 부동산 등은 검토 대상 옵션 여러 가지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테크, 에너지, 산업재, 헬스케어 분야는 노출의 혼재 양상을 보인다. 이는 동일한 세제 변화라도 산업별 수익구조·비용구조·자본집약도에 따라 체감 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시장 시나리오: “안도 랠리”와 길트 수익률
스티펠은 감세 여력(fiscal headroom)이 사실상 없다는 점에서 예산의 직접 수혜자는 제한적일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불확실성을 거둬내는 발표 자체가 촉매가 되며, 정책 충격이 예상보다 제한적일 경우 시장에서 이른바 “안도 랠리(relief rallies)”가 전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편 성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세수 확보를 담보하는 ‘신뢰할 만한 계획’이 제시되면, 영국 국채(길트, gilt) 수익률은 하향 압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평가배수를 지지하는 채권 할인율 하락을 통해 영국 주식 전반에 우호적 환경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핵심 개념 해설: 용어와 메커니즘
헤드라인 세율은 대중이 가장 주목하는 명목 세율을 뜻한다. 영국의 경우 소득세, 국민보험, 부가가치세, 법인세가 이에 해당한다. 공약상 이들 세율을 동결하면, 정부는 세율 인상 없이 세수를 늘리기 위해 과세표준·공제 축소·과표 구간 조정 같은 ‘비가시적’ 수단을 활용하게 된다. 이를 브래킷 크리프(bracket creep)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물가·임금 상승으로 명목 소득이 늘면 더 높은 세율 구간에 자동 진입해 실효세부담이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국민보험(NI)은 사회보장 재원을 위한 급여세 성격의 부담으로, 소득세와는 별개로 부과된다. 비즈니스 레이트는 사업용 부동산에 매겨지는 재산세로, 소매·외식·서비스 업종에는 비용 측면 압력으로 작용한다. 윈드폴세는 통상 에너지처럼 초과이윤이 특정 시기에 급증한 업종에 부과되며, 자본이득세(CGT)는 자산 처분 차익에, 상속세(IHT)는 자산 이전에 과세한다. ISA는 이자·배당·양도차익에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개인 저축계좌이고, ‘엑시트 택스’는 개인·법인이 관할 밖으로 자산·거주·본사를 이전할 때 잠재적 양도차익 등에 과세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길트(gilt)는 영국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뜻한다.
업종별 노출과 정책 조합의 함의
스티펠은 건자재·주택건설·부동산을 다중 경로로 민감하다고 평가했다. 과표·임계값 조정은 가계의 순소득과 주택 수요에, 비즈니스 레이트는 상업용 자산의 보유·운영 비용에 직간접 영향을 준다. 펍과 비즈니스 서비스 업종 역시 임금·임대료·에너지 비용과 얽힌 세부담 변화에 민감하다. 투자펀드는 ISA 개편, CGT·배당 과세 체계 변경이 자금 유입·회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테크·에너지·산업재·헬스케어는 개별 조치별로 상쇄 효과가 얽혀 ‘혼합 노출’ 양상을 보인다. 동일한 총세수 목표라도 어떤 조합을 택하느냐에 따라 실물경제의 성장·투자·고용 경로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정치적 제약과 정책 신뢰의 균형
공약 준수는 정치적 신뢰의 핵심 축이지만, 재정수지 악화가 진행되는 환경에서는 재정 건전성에 대한 신호 또한 시장 신뢰에 직결된다. 1988년의 “no new taxes” 사례가 시사하듯, 공약과 현실 간 간극이 커질수록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물음표가 커진다. 따라서 증세 필요성을 부인하기보다, 성장 훼손 최소화와 분배 형평성을 절충하는 설계가 중요하다. 스티펠이 강조하듯, 이번 예산은 결국 “누가 더 넓은 어깨인가”를 가르는 선택이며, 설득력 있는 근거와 단계적 이행 로드맵이 신뢰를 좌우할 것이다.
시장 관전 포인트
첫째, 길트 수익률의 방향성이다. 신뢰도 높은 세수 계획이 제시되면, 재정 리스크 프리미엄 축소를 통해 수익률이 내려갈 수 있다. 둘째, 주식시장 섹터 로테이션이다. 민감 업종에서의 우려가 완화될 경우 단기 안도 랠리가, 반대로 예상 밖의 고강도 세제가 도입될 경우 방어주 강세가 나타날 수 있다. 셋째, 임계값 조정과 실효세율이다. 명목 세율을 동결하더라도 임계값·공제 조정은 가계와 기업의 실효세 부담을 눈에 보이지 않게 끌어올릴 수 있다.
결론
스티펠의 평가는 명확하다. 이번 영국 예산안은 정치적 제약과 재정 현실의 충돌 속에서 구성될 것이며, 직접적 감세 여지는 제한적이다. 다만 불확실성 해소 자체가 자산가격에 긍정적 촉매로 작용할 수 있고, 성장 저해를 최소화하는 세수 확충 로드맵은 길트 수익률 하락과 주식시장 전반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업종별로는 펀드·건자재·펍·비즈니스 서비스·주택건설·부동산에 대한 민감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테크·에너지·산업재·헬스케어는 혼합 노출을 보이는 만큼, 투자자들은 정책 조합별 차등 영향을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