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리포트
일본 기업들이 수십 년간 이어진 디플레이션의 굴레에서 벗어나 가격 인상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을 완화시키며 ‘사과 광고’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2025년 7월 29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아카기 뉴교(Akagi Nyugyo)는 2016년 자사 아이스 캔디 가격을 10엔 인상하면서 어두운 배경음악과 함께 임직원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 1분짜리 TV 광고를 내보냈다. 그러나 같은 기업은 지난해 ‘다음 세 번의 가격 인상 때마다 더 깊이 절을 하겠다’는 재치 있는 사진 광고를 선보이며 분위기를 180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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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조사부를 총괄하는 오카모토 히데유키 팀장은 “2016년과 비교하면 소비자들이 가격 인상에 훨씬 관대해졌다”며 “‘가격 인상=악(惡)’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1. 임금 인상이 가격 전가의 심리적 ‘완충 장치’로 작용
일본 소비자 심리가 바뀐 가장 큰 배경은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오른 임금이다. 노동시장이 구조적 인력 부족을 겪으면서 근로자들은 더 높은 급여를 요구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기업들도 원가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할 여지가 생겼다.
“일본 소비자들은 이제 지속적 물가 상승 시대에 살고 있음을 스스로 체감하고 있다.” — 도쿄대 와타나베 쓰토무 명예교수
와타나베 교수 연구팀이 일본·미국·독일 등 5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4년 전만 해도 일본 응답자 대다수는 10% 가격이 오르면 다른 슈퍼마켓으로 옮기겠다고 답했으나, 작년 조사에서는 ‘매장도, 품목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응답이 우세해 해외 소비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변했다.
2. 식품업계, 물가 인상 러시
민간 싱크탱크 데이터뱅크 조사에 따르면 2025년 7월 한 달 동안 대형 식품업체 200곳이 총 2,105개 품목 가격을 평균 15% 올릴 계획이다. 이는 전년 동월 대비 무려 5배 급증한 수치다.
79세 연금 생활자 우스바 후사코 씨는 “예전엔 한두 품목만 올라서 기억이라도 했는데, 지금은 수십·수백 가지가 동시에 올라 뭐가 올랐는지조차 헷갈린다”면서도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3. 코코아값 급등에 직면한 메이지
국내 초콜릿 시장 점유율 25%로 사실상 ‘가격 결정자’인 메이지(Meiji)는 2022년 이후 총 9차례 가격을 올렸다. 포장재·물류비·코코아 선물가격 폭등이 직접적 요인이다.
아키라 요시다 카카오 마케팅 부문 총괄은 “2022년만 해도 대형 유통업체들이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요청했지만, 지금은 매끄럽게 수용하는 편”이라며 “소비자들도 마지못해 따라오고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25년 6월 단행한 20% 인상 이후 일부 소매점 판매량이 20% 이상 급감하면서 가격 피로감이 현실화되고 있다. 요시다 총괄은 “이 이상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며 “초콜릿을 일상재가 아닌 프리미엄 사치품으로 재포지셔닝해야 한다”고 말했다.
4. 엔겔 계수 43년 만에 최고…지속 가능성에 의문
엔겔 계수란 가계 총지출 중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로, 일반적으로 계수가 높을수록 생활이 팍팍하다는 지표로 해석된다. UBS 증권 레이 이하라 애널리스트는 “2024년 일본의 엔겔 계수는 28.3%로 43년 만에 최고치”라며 “소비자들이 쇠고기 대신 닭고기를 선택하는 등 가격 민감도가 점차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질 임금은 여전히 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2025년 상반기 총선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 연립여당이 참패한 주요 배경으로 지목된다.
5. BOJ, 추가 금리 인상 명분 확보?
일본은행(BOJ)은 이번 주 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전망이지만, 임금·물가 선순환이 유지될 경우 연내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할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 3년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를 상회했으며, 이는 1990년대 초 자산버블 붕괴 이후 경험하지 못한 ‘높은 물가의 뉴노멀’이다.
와타나베 교수는 “임금 주도형 가격 상승 모멘텀이 무너지면, 우리 세대에서 다시는 이런 기회를 맞기 어려울 것”이라며 “지금이 기로”라고 강조했다.
6. 전문가 시각: 필수·사치 소비재 ‘투트랙 전략’ 필요
기자가 취재한 여러 애널리스트들은 “임금이 추가로 오르지 않는 한, 필수재 가격 인상 여력은 한계에 봉착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저가 전략으로 유명했던 편의점 PB(private brand) 상품과, 프리미엄 초콜릿·와인처럼 내구성 있는 사치품 간 가격 경계가 더 뚜렷해질 것이란 진단이다.
또 다른 변수는 미국의 추가 관세다. 일본 자동차·기계업체는 미 시장에서 가격을 올리지 못해 수익성이 압박받고 있으며, 이는 내년도 임금 협상력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7. 용어 추가 설명
디플레이션: 일반적인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제 현상. 장기화될 경우 기업 이익과 임금이 정체돼 소비가 둔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엔겔 계수: 가계 소비에서 식료품 지출 비중을 뜻하는 지표. 20%대 후반이면 생활비 부담이 크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가격 전가(pass-through): 원재료·인건비 상승분을 최종 판매가격에 반영하는 행위. 전가율이 높을수록 기업 수익성이 방어되지만 소비자 부담이 커진다.
8. 결론 및 전망
일본은 지금까지 ‘가격 인상=사과 광고’라는 문화적 관성을 깨고 물가·임금 동반 상승 국면으로 이동 중이다. 그러나 실질 임금이 회복되지 않으면 소비 위축이 뒤따를 수밖에 없으며, 이는 BOJ의 금리 정상화 전략에도 제동을 걸 것이다. 각종 구조적·외부 요인을 고려할 때, 앞으로 1~2년이 ‘가격 인상 내성’을 완전히 체화할 골든타임이 될 가능성이 크다.
$1 = 147.77엔, 보도 시점 환율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