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주주 제안의 표 대상을 둘러싼 프록시 분쟁 처리 방식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기업들이 주주 결의안을 주주총회 안건에서 제외하기 위해 SEC에 허가를 요청하는 근거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기후변화나 인력 다양성과 같은 쟁점 의제에 대해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표결을 강제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025년 11월 17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SEC는 이날 웹사이트에 공지를 올려 내년 6월까지 최소한은 통상적인 프록시 이의신청 사안—예컨대 제안서 제출이 지연되었는지, 제안자가 충분한 지분을 보유했는지—에 대해 더 이상 직접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만, 예외적으로 기업이 주(州)법 등 관할권을 근거로 안건 제외를 주장하는 경우에는 판단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SEC의 새 접근법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폴 앳킨스(SEC 위원장)이 지난달 제기한 문제의식—많은 주주 제안이 델라웨어 법에 비추어 부적절할 수 있다—와 맥을 같이한다.
법무법인 프레시필즈 파트너이자 지난해 12월까지 SEC 내 해당 부서(the division)의 국장을 지낸 에릭 거딩은, 이번 정책 전환과 앳킨스 위원장의 견해를 감안할 때 기업들이 앞으로는 주(州)법상 면제(state exemption)를 근거로 안건 제외 요청을 제출하는 전략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거딩은 “델라웨어 법원과 주 의회가 앳킨스의 견해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주주 제안이 사실상 막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SEEKING ASSURANCES — ‘무액션’ 보장의 축소
매년 이맘때면 수백 개 기업이 SEC 기업금융국(Division of Corporation Finance)에 주주 결의안을 의사표에서 제외하더라도 집행조치를 받지 않도록 보장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러한 ‘무액션 보장’no‑action assurance은 약 절반 정도의 사례에서 승인되어 왔다.
최근 주주총회에서는 인력 다양성과 온실가스 배출 같은 의제가 큰 주목을 받았으나, 대형 자산운용사들의 찬성률은 최근 몇 년 사이 낮아지는 추세였다.
펀드 업계의 주요 관계자들은, 기업들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이슈에 자발적 개선 조치를 도입하면서, 예전만큼의 지지 표명이 자주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은 이러한 ESG 노력을 비판해 왔고, SEC 역시 올해 들어 활동주의 투자자의 영향력을 낮추는 추가 조치를 이미 취한 바 있다.
ESG 활동가들을 대리하는 변호사 샌퍼드 루이스는 이번 변경으로 “사실상 거의 모든 제안이 주주 권리에 대한 극단적 공격 아래에서 차단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 활동가들이 향후에는 개별 이사들에 대한 도전으로 초점을 옮길 수 있다고 말했다.
SEC 대변인은 이메일에서 이번 결정은 “주주 제안 절차에서 직원의 역할, 인력·예산 자원, 그리고 시의성 문제를 면밀히 고려한 끝에 내려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변인은 이어 “정부 셧다운 기간 동안 900건이 넘는 등록신청서와 다수의 기타 제출서류가 접수되었다”며, “이번 결정은 직원들이 자본 형성과 투자자 보호를 포함한 시간 민감적 거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고 밝혔다.
SEC 내 유일한 민주당 위원인 캐롤라인 크렌쇼는 성명에서 이번 변경을 “자원 배분의 문제라기보다 발행사에 대한 퍼주기에 가깝다”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주주에 대한 적대 행위”라고 비판했다.
용어 설명: 프록시, 주주 제안, ‘무액션’ 보장
프록시(proxy)란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위임받아 대리행사하는 절차를 말한다. 주주 제안은 일정 요건을 갖춘 주주가 회사 정관 변경, 정책 채택, 공시 강화 등 특정 안건을 총회 표결에 부치는 제도를 의미한다. SEC는 오랜 기간 기업이 “해당 안건을 표에서 제외해도 법 집행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직원 견해를 제공해 왔는데, 이를 업계에서는 관행적으로 ‘무액션 보장’no‑action이라고 부른다. 이번 방침은 이 보장에 대한 심사를 축소하거나 주(州)법 등 관할 사유가 있을 때만 개입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분석과 함의: 규제의 무게중심, 연방에서 주(州)로
SEC가 제출 지연, 지분 요건 등 ‘형식적 결함’에 대해 더 이상 사전 판단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기업–활동가 간 분쟁의 주 무대를 연방 규제 절차에서 주(州)법과 법원으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기업의 관점에서는 주법상 권한을 논거로 내세우며 안건 제외를 시도할 전략적 유인이 커진다. 반면 활동가들은 개별 이사 선임/해임 국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으로 전술적 재배치를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기사에 인용된 대로 “우리가 알던 주주 제안의 종언”이라는 과격한 전망과도 연결된다.
실무적으로, SEC의 인력과 시간은 자본 조달 거래나 투자자 보호 등 시간민감형 업무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대변인 발언에 따르면 정부 셧다운 기간 누적된 900건 이상의 등록서류 처리 부담이 가중된 점도 이번 결정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주주 제안 리스크 관리는 각 회사의 주법 해석과 사법부 판단에 더 의존하게 되며, 덜 예측 가능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치 지형도 변수다. ESG 이슈에 대한 공화당 측의 비판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자발적 공시·정책 개선을 내세우는 기업과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행동주의 측의 힘겨루기가 지속될 전망이다. 이번 조치가 표결 장(場) 자체를 좁히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향후 의제 설정권을 둘러싼 공방은 의장석이 아닌 법정으로 옮겨갈 여지가 있다.
다만, 향후 델라웨어 법원과 주 의회의 해석 및 입법 동향이 관건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 파급력은 사법·입법의 후속 신호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과 투자자 모두, 주주권 행사 채널 다변화와 거버넌스 리스크 관리체계 재정비가 요구되는 국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