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주 렉싱턴발 ─ 미 연방 법원이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의 ‘오픈뱅킹(Open Banking)’ 규정 집행을 전격 중단했다.
2025년 10월 29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켄터키 동부지방법원 대니 리브스(Danny Reeves) 판사는 포트뱅크(Forcht Bank)·켄터키은행협회(Kentucky Bankers Association)·뱅크폴리시인스티튜트(Bank Policy Institute) 등 원고 3개 기관이 제기한 소송에서 규정 준수 기한(컴플라이언스 데드라인)을 잠정적으로 유예하는 가처분(Injunction)을 결정했다.
리브스 판사는 결정문에서 “원고와 회원사들이 회복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게 될 위험이 크다”고 적시하며, CFPB가 권한 범위를 넘어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이 다음 금융 서비스 제공업체로 데이터를 원활하게 이전하도록 허용한다는 핵심 취지가 담긴 새 규정은 CFPB가 재검토를 마칠 때까지 효력이 정지된다.
오픈뱅킹 규정의 핵심 내용
해당 규정은 2024년 말 조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 최종 확정된 것으로, 은행·신용카드·모바일 월릿·결제 앱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저장된 소비자 데이터를 추가 비용 없이 제3의 금융사와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일명 ‘데이터 이동권’으로도 불리며, 소비자는 앱 하나로 잔액·거래내역·신용조건 등을 통합 관리하고, 필요 시 다른 은행으로 손쉽게 갈아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전국은행연합·주 단위 은행협회·중소은행은
“규정이 과도한 기술 투자와 내부 시스템 개편을 요구해 비용 부담이 막대하다”
며 행정 절차법(APA) 위반과 권한 남용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정치적 배경과 CFPB의 운명
이번 판결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 CFPB 수장이 새로 임명되며 규제 기조가 급변한 가운데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CFPB는 폐지돼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 왔으며, 실제로 *CFPB 예산 축소·조직 개편 등이 추진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기존 규정 전면 재검토 작업이 진행 중이며, 오픈뱅킹도 그 대상이다.
CFPB는 제도적 독립성을 보장받는 기관이지만, 예산이 연준(연방준비제도)을 통해 곧바로 배정되는 특수 구조 탓에 행정부·의회의 견제 대상이 돼 왔다. 이번 가처분으로 CFPB는 ‘규정을 다시 쓰는 동안 집행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셈인데, 내부적으로도 새 리더십 아래 대대적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원고 측 반응
원고 3개 기관은 공동 성명에서
“이번 결정은 규정이 다시 작성되는 동안 은행들이 불필요한 시간·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보장한다”
고 환영했다. 특히 켄터키지역 중소은행들은 디지털 전환 투자 여력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대형 핀테크·빅테크 기업과의 데이터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를 줄곧 제기해 왔다.
반면 소비자단체와 핀테크 업계는 “소비자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려면 데이터 호환성이 필수”라며, 판결이 디지털 금융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CFPB는 즉각적인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소송 대응팀은 향후 법적 옵션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잠정 중단이 시장에 던지는 시사점
전문가들은 가처분 효력이 장기화될 경우, 핀테크 스타트업과 빅테크 결제 플랫폼의 사업 전략이 조정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신용평가업체 무디스는 “데이터 공유가 지연되면 소비자 이동률이 낮아져 전통 은행의 단기적 수익성은 개선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경쟁·혁신이 둔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2026년 1월로 예정된 1차 준수 기한이 미뤄짐에 따라, 대형 은행이 준비해 온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인프라 투자 계획도 재조정 국면에 들어갔다. 법무팀 관계자는 “판결이 확정이라기보다 임시 조치이므로, 향후 항소심·최종 규정이 어떻게 나오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전문용어 해설
① 오픈뱅킹(Open Banking): 금융기관이 표준화된 API를 통해 고객 데이터를 외부 기업과 고객 동의하에 공유하는 제도다. 한국에서는 2019년 도입됐으며, 타행 계좌 조회·간편이체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미국판 오픈뱅킹은 아직 의무화되지 않았으나, CFPB 규정이 그 법적 근거다.
② 가처분(Injunction): 본안 판결 전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막기 위해 법원이 내리는 잠정 명령이다. 규정·법률·행정행위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거나 특정 행위를 금지할 수 있다.
③ CFPB(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 2010년 ‘도드-프랭크 월가 개혁법’으로 설립된 미국 소비자 금융감독 전담 기관이다. 주택담보대출, 신용카드, 학자금 대출 등 소비자 금융상품 규제를 담당한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 보호’와 ‘규제 비용’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미국 금융 규제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