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규제 당국이 헬스케어 노동시장에 칼을 빼 들었다. 연방거래위원회(FTC)는 11일(현지시간) 대형 병원 체인과 의료인력 파견·채용 전문업체를 대상으로 고용계약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제출을 요청하며 본격적인 조사에 돌입했다.
2025년 9월 10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FTC의 앤드루 퍼거슨(Andrew Ferguson) 위원장은 복수의 헬스케어 대기업에 공식 서한을 발송해 “사용 중인 모든 고용계약을 원본 그대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이번 조사는 특히 의료계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경업금지 조항(non-compete agreement)의 실태와 경쟁 제한 효과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경업금지 조항은 근로자가 퇴사한 뒤 일정 기간 같은 업종 또는 유사한 직무로 이직하는 행위를 제한하는 계약 조항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급 정보 유출을 막고 기업의 교육·투자 비용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지만, 의료인력처럼 인적 자산이 핵심인 산업에서는 노동자 이동성을 심각하게 제약해 진료 공백, 인건비 상승, 환자 부담 증가 등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주요 조사 대상과 절차
FTC가 밝힌 이번 1차 서한은 상급종합병원 네트워크 4곳과 전국 단위 의료 인력 파견회사 3곳을 포함한다. 기관명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HCA 헬스케어, 텐넌트 헬스(Tenet Health) 등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각 회사는 30일 이내에 ▲의사·간호사·약사·행정직 등에 적용되는 모든 고용계약 전문(全文) ▲경업금지 조항 적용 대상 인원·기간·범위 ▲조항 위반 시 손해배상액 또는 벌칙 규정을 FTC에 제출해야 한다.
자료가 접수되면 FTC 경쟁국(Bureau of Competition)과 경제학자들이 시장 집중도(HHI)·직군별 이직률·지역별 의료공급 부족지수 등과 결합해 ‘경쟁 제한 효과’를 계량 분석한다. 이후 공개 청문회 및 서면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시정 명령, 과징금, 또는 연방 차원의 규제 가이드라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업계는 초긴장 상태다.
FTC “경업금지 조항은 종종 혁신을 저해하고 의료 서비스 가격을 상승시키며,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전가되는 부담을 키운다”
제도적 배경과 파급 효과
미국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의료 서비스 종사자 870만 명 가운데 약 45%가 어떤 형태로든 경업금지 조항에 묶여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 의료진은 현장 특성상 지역사회와 환자와의 신뢰 관계가 매우 중요해 단순 이동보다 숙련도·네트워크·환자 데이터가 결합된 ‘무형 자산’ 가치가 높다. 이 때문에 경업금지 조항이 경쟁 질서를 훼손한다는 문제 제기뿐 아니라 공공 보건 측면에서도 부정적 영향이 불거져 왔다.
FTC는 올해 1월 이미 ‘모든 산업 분야의 경업금지 조항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규정 초안을 발표한 바 있다. 다만 의학·바이오·국방과 같이 국가 안전이나 생명·건강과 직결되는 업종에서는 예외 규정이 포함되어 논쟁이 치열했다. 이번 헬스케어 특화 조사는 그 연장선에서 실제 현장 자료를 확보해 예외 허용 범위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시장조사업체 모닝스타(Morningstar)는 “경업금지 조항이 폐지되면 의료진 이동성이 연 8~12%포인트 증가하고, 병원 체인의 인건비 부담이 당장은 커질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공급 확대→경쟁 촉진→진료비 안정이라는 구조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도 제시했다.
법률적·경제적 쟁점
전문가들은 ▲근로계약의 자유와 ▲공정경쟁·환자 권익이라는 두 축이 충돌하는 이번 사안이 미국 판례법에 중대한 선례를 남길 것으로 내다본다. 실제로 2023년 11월 펜실베이니아주 항소법원은 한 지역병원이 외과의에게 부과한 50마일(약 80㎞) 이동 제한을 무효화하며 “비가역적 의료 전문성을 도구로 삼아 지역 의료 접근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반면 미국병원협회(AHA)는 성명을 통해 “환자의 민감정보와 수술기술, 경영 노하우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FTC의 일괄 금지 접근법에 우려를 표했다. AHA는 향후 행정소송 및 로비를 병행해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전문가 시각 및 전망
취재진이 접촉한 아이오와대 보건경제학과의 레이첼 권 교수는 “경업금지 계약은 표면적으로는 기업의 투자 보호 장치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장 진입 장벽이자 가격 결정력을 높이는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료서비스는 대체재가 제한적이므로 노동 이동이 막히면 결국 공급 독점이 심화돼 환자가 떠안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변호사인 마이클 루빈스키는 “FTC 조사 결과가 연방 법제화로 이어질 경우, 주(州) 단위 라이선스 체계·전속계약 문화 등 미국 의료시장의 고질적 구조에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며 “의료 인력 채용 플랫폼과 원격진료 스타트업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일각에서는 경업금지 조항이 사라지면 단기적 인력 유출로 시골·저소득 지역의 의료 공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FTC는 “취약 지역 의료 접근성이 악화되지 않도록 보완 대책을 병행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독자 안내: 경업금지 조항, 왜 중요한가?
경업금지 조항은 통상 ▲퇴사 후 특정 기간(예: 6개월~2년) ▲지리적 범위(예: 10~100㎞) ▲유사업종·직군 내 재취업 금지 등을 명시한다. 위반 시 합의금·손해배상·가처분 등이 따라붙어 실질적 구속력이 높다. 미국 근로자의 약 18%가 이 조항 대상이며, 의료·IT·컨설팅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에서 특히 빈번하다.
한국에서도 2015년 대법원이 “근로자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만 유효”하다고 판시한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침을 마련해 직종·경력·보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해외 규제 동향은 국내 기업·병원에도 시사점이 크다.
향후 일정 및 체크포인트
FTC는 2026년 2분기까지 1차 분석을 마무리하고 결과를 연방관보(Federal Register)에 공표할 계획이다.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과 행정명령 초안 발표가 이어질 전망이다. 업계는 ▲자료 제출 기한(10월 중순) ▲중간 브리핑(12월 예상) ▲의회 청문회(2026년 1분기)를 핵심 이벤트로 꼽는다.
헬스케어 종사자, 병원 경영진, 투자자는 상응 전략이 요구된다. 인력 유치·유지 정책을 재설계하고, 계약 문구를 재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의료 스타트업이나 디지털 헬스 기업은 규제 변화에 따른 인재 확보 기회를 선제적으로 모색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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