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WASHINGTON – 미국이 유럽연합(EU)으로부터의 수입에 갈수록 더 의존하고 있으며, 제품 수와 총액 모두에서 중국을 앞서고 있다는 독일 경제연구소 IW(Institut der deutschen Wirtschaft)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25년 9월 1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번 분석은 2010년부터 2024년까지 15년간의 무역 데이터를 정밀 추적해 작성됐다. 연구진은 미국 세관 통계를 제품군(product group) 단위로 분류해 EU·중국 의존도를 비교했다. 그 결과 미국이 절반 이상(≥50%)을 EU에 의존하는 제품군 수는 2010년 2,600여 개에서 2024년 3,100여 개로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해당 제품군의 총 수입액은 2.5배 증가해 2024년 2,870억 달러(약 3,400억 유로)에 달했다. 이는 화학제품·전기전자·기계류 등 미국 제조업 밸류체인에서 핵심적인 품목이 다수 포함된 결과로, 이전까지 ‘제조 허브’로 인식돼 온 중국산 대체보다 EU산 수입이 더 빠르게 확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디리스킹(De-risking)과 무역 재편
IW는 보고서에서 “디리스킹(de-risking)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의 대(對)중국 의존도는 현저히 낮아졌다”라고 진단했다. 디리스킹이란 한 국가 또는 특정 공급처에 과도하게 집중된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조달처를 다변화하는 전략을 뜻한다. 중국이 2024년 미국 수입 제품군 2,925개에서 여전히 높은 존재감을 보였으나, 총액 기준으로는 EU보다 400억 달러가량 적은 2,470억 달러에 그쳤다.
보고서는 특히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관세 협상에서 ‘대부분의 EU산 제품 15% 기본 관세율(baseline rate)’에 합의했던 점을 지적했다. IW는 “EU가 미국 수입망에서 차지하는 구조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협상 당시 더 강경한 교섭 지렛대를 확보할 여지가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IW 공동 저자인 사미나 술탄(Samina Sultan)은 “미국이 관세를 계속 올린다면 결국 스스로 발등을 찍는 결과가 될 것임을 이 연구로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보고서는 EU가 “최후의 수단”으로 미국 경제에 필수적인 특정 품목에 대해 수출 제한 카드를 검토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실제로 제재가 단행될 경우 양쪽 모두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는 협상용 압박 수단에 가깝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제품군’·‘기본 관세율’ 용어 설명
여기서 말하는 제품군(product group)은 국제통일상품분류(HS Code) 6단위 이상 세분된 품목을 의미한다. 예컨대 ‘유기화학제품’·‘의약중간체’·‘반도체 제조장비’ 등이 별도 그룹으로 분류된다. 또 기본 관세율(baseline rate)은 FTA 혹은 특별협정 혜택이 적용되지 않을 때 자동 부과되는 최저 관세율을 가리킨다.
IW 연구 결과는 EU가 ‘규모의 경제’를 무기로 삼아 미국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미국 산업계가 단기간 내 EU 공급처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점은 향후 무역 긴장이 고조될 때 EU가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협상 파워 레버리지로 평가된다.
다만 전문가들은 “상호의존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관세 인상·수출 제한 등 강대강 대치가 이어질 경우, 공급난·가격상승 등 부메랑이 양쪽 경제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정책 당국은 정치·경제적 영향과 기업별 대응 비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