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 ‘은퇴계좌의 마지막 블랙박스’가 열린다
2025년 8월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 한 장이 월가·실리콘밸리·워싱턴의 공기를 동시다발적으로 바꿨다. 1974년 제정된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ERISA) 체계를 관통하는 이 명령은 401(k)·403(b) 등 미국의 확정기여형 퇴직연금계좌가 암호화폐(디지털 자산)와 사모자산(Private Assets)을 정식 투자대상으로 편입할 수 있는 길을 공식적으로 열어둔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규제 관점에서는 노동부(DOL)의 ‘정보 서한(2020년)’이 이미 사모주식에 제한적 문을 열었지만, 암호화폐는 이번이 사실상 최초의 제도권 진입 선언이다. 미국 퇴직연금 적립금(43조 달러) 가운데 401(k)·403(b)가 차지하는 9조 달러가 거대 댐이라면, 그 수문(樞門)이 부분 개방된 셈이다. 본 칼럼은 해당 조치가 향후 10년간 글로벌 자본시장·연금시장·감독지형에 미칠 구조적 파급효과를 구체적 데이터와 사례, 그리고 경제이론을 종합해 전망한다.
■ 1. 미국 401(k) 시장 구조와 현행 투자옵션
- 총 적립금 : 9조 달러(2025 Q1, ICI)
- 가입 근로자 : 9백만 개 기업 · 6천만 명
- 디폴트 상품 : 타깃데이트펀드 64%, 인덱스·액티브 뮤추얼펀드 34%, 예·적금·MMF 2%
퇴직연금 계좌는 ‘세액 이연(Deferred Tax)’ 효과를 활용해 30년 이상의 복리 수익이 축적되는 구조다. 그간 ERISA는 수탁자 책임(Prudent Man Rule)을 이유로 고비용·저유동성·투명성 결여 자산을 배제해 왔다. 그러나 저금리·고령화 시대에 전통 60대40(주식·채권) 포트폴리오 수익률이 한계치를 드러내면서, 대체투자 다변화 요구가 커졌다.
■ 2. 행정명령 핵심 — ‘자산 목록을 닫지 말라’
행정명령의 3대 골자는 다음과 같다.
- DOL·재무부·SEC에 180일 내 사모자산·디지털 자산 운용 가이드라인 제정 지시
- 401(k) 플랜 스폰서(고용주)가 투자메뉴 다각화를 추진할 때 수탁자 책임 보호 Safe Harbor 검토
- 레코드키퍼·커스터디안이 보유 ·관리 ·감독해야 할 리스크 관리·공시 의무 재설계
“근로자의 장기 재무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탁자가 특정 자산군을 사전에 배제해선 안 된다.” — 행정명령 서문 중
■ 3. 자금 유입 시나리오 & 시장 규모 추산
구분 | 2026 저(保守) | 2028 중(기본) | 2030 고(낙관) |
---|---|---|---|
401(k) 내 대체투자 비중 | 1% | 3% | 5% |
암호화폐·사모자산 총 유입액 | 900억 $ | 2,700억 $ | 4,500억 $ |
S&P 500 시가총액 대비 비율 | 0.7% | 2.0% | 3.3% |
위 계산은 401(k) 적립금 9조 달러·연평균 4% 성장, 시장 수용 속도 곡선(Bass Diffusion)을 적용한 것이다. 낙관 시나리오가 실현될 경우,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시총 규모는 현 수준 대비 최소 1.5배~2배 상승 여지가 있다.
■ 4. 장기 구조효과 — 자본시장·기업금융·통화정책
1) 암호화폐 ✕ 제도권 신뢰
- 볼래틸리티 프리미엄 하락 — 연기금·퇴직연금의 안정적 매수세는 ‘바이-앤-홀드’ 플로우를 고착, 가격 변동성을 단계적으로 낮출 전망이다.
- 파생상품·리스크 관리 인프라 — 금융기관은 장·단기 커버 차익거래(헤지)를 위한 선물·옵션·스왑 시장을 확대해 금리 · 외환 · 주식과 유사한 파생시장을 구축할 것이다.
2) 사모자산 ✕ 퇴직연금
- 중견·스타트업 기업의 자본조달 창구 다변화로 일자리 창출 효과
- 장기 ESG 프로젝트— 인프라·재생에너지·바이오헬스 등 Patient Capital 필요 분야에 ‘신규 LP(Limited Partner)’ 등장
3) 통화정책 함의
- 디지털 자산 가격이 경기·유동성 사이클에 편입되면 Fed 및 ECB의 금융불안정성( FSI ) 평가 모델이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 퇴직연금 자금이 일정 비율로 BTC·ETH 에 배분될 때, 미 달러 M2 대비 Shadow Money 지표가 확장되어 정책금리‧유동성 간 연계가 복잡해질 수 있다.
■ 5. 리스크 맵 — 변동성·비용·규제·교육
- 가격 변동성 : BTC 연 σ ≈ 55% — 시뮬레이션상 포트폴리오 SD +2~4%p 상승 가능
- 수수료·성과보수 : 사모펀드 ‘2+20’ 구조는 현재 401(k) 평균 Expense Ratio (0.41%)의 5~10배
- 감독 공백 : SEC·CFTC 관할 충돌, DOL Safe Harbor 해석 차이 발생 시 Compliance 리스크
- 투자자 교육 : Behavioral Bias 방지 — 확증편향·손실 회피·과도한 자신감
■ 6. 글로벌 파급 — 한국 퇴직연금·국부펀드·통합거버넌스
- 한국 :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 초기 단계. 미국 모델을 참고해 ‘투자 가이드라인 + 교육 의무 + 단계적 한도’ 3트랙을 설계해야 한다.
- EU : EIOPA(유럽보험연금감독청)가 PEPP(범EU 연금상품)에 대체투자 5% 상한 제시, 미국 동향에 따라 재검토 가능성.
- 중동 국부펀드 : ‘패시브 장기자본’으로서 미국 401(k) 규제 완화에 맞춰 크립토 커스터디·리서치 JV 설립 타진.
■ 7. 시계열 체크포인트 (2025 ~ 2030)
연도 | 정책ㆍ이벤트 | 주요 모니터링 지표 |
---|---|---|
2025 Q4 | DOL 가이드라인 초안 공개 | Safe Harbor 범위·수탁자 의무 MD&A |
2026 Q2 | 1호 401(k) 암호화폐 타깃데이트펀드 출시 | 가입률·Asset Under Management(AUM) |
2027 Q1 | SEC ‘Crypto Disclosure Rule’ 시행 | 10-K · Form PF 신규 항목 |
2028 Q3 | 미국 대선 — 정책 연속성 변수 | 후보별 연금·암호화폐 공약 |
2030 Q4 | 401(k) 내 대체투자 비중 5% 달성 가능 시점 | 시가총액·변동성 지수·세컨더리 거래액 |
■ 8. 필자의 종합 전망
첫째, 단기(1~2년)은 규제·수탁자 책임 구체화 국면이다. 고용주 · 레코드키퍼가 법적 리스크를 우려해 시범 도입(pilot) 형태로 소수 계좌·타깃데이트펀드에 편입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중기(3~5년)은 세컨더리 마켓·커스터디 인프라 고도화 단계다. 기관 전용 거래소, 암호화폐 담보 대출, 보험 솔루션이 등장하며 유동성·리스크 관리 체계가 뒷받침될 전망이다.
셋째, 장기(5년 이상)은 글로벌 연금 포트폴리오의 ‘Δ(델타) 자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다만 변동성·정치적 이슈가 반복될 때마다 투자한도가 탄력적으로 조정될 것이며, 완전 자유화까지는 10년 이상의 시행착오를 예상한다.
정리하면, 이번 행정명령은 단순히 ‘코인에 투자할 수 있는가?’를 넘어 퇴직연금 → 자본조달 → 실물혁신 → 연금수익으로 이어지는 신(新) 자본 순환 고리를 실험하는 서막이다. 제도 설계와 교육, 그리고 리스크 관리가 균형을 이루는 한, 향후 10년간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연금생태계의 지도를 바꿀 촉매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중석 | 경제칼럼니스트·데이터 분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