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의 내부 혼란이 미국 기업들이 전 세계로 수출하려는 기술·부품 허가 절차를 마비시키면서 수천 건의 라이선스 신청이 장기간 보류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정부·업계 관계자 두 명을 인용해 “BIS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31일(현지시간) 전했다.
2025년 8월 1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허가 지연으로 가장 주목받는 사례는 엔비디아(Nvidia)의 인공지능(AI)용 H20 그래픽칩이다. 회사 측은 7월 14일 “미국 정부로부터 곧 허가를 받을 것”이라는 서면 보장을 받았다고 밝혔으나, 현재까지 실제 라이선스 문서는 발급되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주문이 걸려 있다고 추산한다.
한 미 정부 관계자는 “현재 라이선스 적체는 30여 년 만에 최악”이라며 “절차가 멈춰 선 상태”라고 설명했다.
엔비디아뿐 아니라 센서·레이더·소나·반도체 제조 장비 등 다양한 품목이 영향을 받고 있다. US-중국비즈니스위원회(US-China Business Council)의 션 스타인(Sean Stein) 회장은 “반도체 장비 라이선스만 해도 수십억 달러어치가 쌓여 있지만, 움직임이 없다”며 “중국 업체들은 그 사이 국내·타국 공급망으로 발 빠르게 선회하고 있으며, 지연이 길수록 미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감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상무부는 비판에 대해 “BIS는 더 이상 국가안보에 중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라이선스를 무조건 승인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대변인은 “BIS는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무역·안보 정책을 전면적으로 이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평균 처리 기간 38일이었던 2023 회계연도와 달리, 2024년에는 공식 통계조차 집계되지 않고 있다. BIS 내부 직원들은 올해 3월 부임한 제프리 케슬러(Jeffrey Kessler) 차관보가 회의·대외 소통을 스프레드시트로 통제하면서 의사결정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고 증언한다. 여러 정부 부처 간 협의 자리 참석조차 ‘사전 결재’가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BIS란 무엇인가?
BIS(Bureau of Industry and Security)는 미국 상무부 산하 조직으로, 민감 기술·장비의 해외 이전을 통제해 국가안보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전략물자관리원에 해당한다. 허가가 없으면 미국 기업은 특정 국가·기업에 기술을 판매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몇 달 사이 전문가들의 퇴사·명예퇴직이 이어졌다. 이번 주에는 30년 경력의 댄 클러치(Dan Clutch) 수출집행국장 대행이 떠나면서 ‘경험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중국 주재 수출통제 담당관처럼 핵심 현장 인력의 공석도 메워지지 않아, 변수가 많은 중국 시장 정보가 제때 본부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기업 컨설턴트들은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 때문에 난항이 거듭되고 있다고 토로한다. 플로리다 소재 무역 전문업체 컴플라이언스어슈어런스(Compliance Assurance)의 짐 안잘론(Jim Anzalone) 대표는 “라틴아메리카로 가는 센서·소나 장비 허가까지 지연되고 있다”며 “수개월 전 신청한 수십 건 가운데 이번 주에야 네 건이 거절됐다“고 말했다.
규제 개정도 ‘스톱’…업계 불확실성 가중
상무부는 5월, 바이든 행정부 시절 마련된 AI 칩 수출 지역 제한 규정을 ‘철회·대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두 달이 넘도록 새 규정은 공표되지 않고 있다. 이미 초안이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진 ‘제재 대상 기업의 해외 자회사까지 규제를 확대’하는 안 역시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의 ‘시간 지연’ 전략이 중국 견제를 위한 고도의 압박 카드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시장 신뢰를 담보로 한 지연 전술은 동맹국·글로벌 고객과의 관계를 약화시킬 위험이 크다”
고 본다. 특히 AI·반도체처럼 공급망이 초국경적으로 얽힌 산업에서는 허가 시스템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 경쟁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문가 의견
① 정책 일관성: 트럼프 행정부 2기 들어 ‘국가안보’ 명분에 무게를 싣는 건 명확하지만, 절차적 투명성이 떨어지면 오히려 전략물자 유출 위험을 높일 수 있다.
② 정부·민간 소통: 기업들은 ‘불확실성’이 가장 큰 비용이라고 지적한다. BIS가 면담·설명회 등 공식 소통 채널을 재가동해야 한다.
③ 국제 공조: 동맹국과 규제를 조율해 ‘우회 수출’을 봉쇄해야 하나, 현재 인력 공백으로 다자 협상력이 약화되고 있다.
미국 기술 수출 통제의 방향성은 글로벌 반도체·AI 생태계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다. 상무부가 라이선스 적체 해소 로드맵과 구체적인 일정표를 즉각 제시하지 않는다면, 중국뿐 아니라 유럽·동남아 지역 기업들까지 ‘탈(脫)미국 공급망’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BIS의 신뢰 회복은 단순 행정 개선을 넘어 미국 첨단기술 산업의 장기 경쟁력을 좌우하는 문제다. 당국은 조속히 인력 보강·정책 명확화·국제 협력을 통해 허가 절차를 정상 궤도에 올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