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전례 없는 수익 공유 모델’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 행정부와 엔비디아·AMD가 합의한 내용에 따르면, 두 기업은 향후 중국에 판매하는 고성능 인공지능(AI) 칩 매출의 15%를 미 연방정부에 직접 지급해야 한다.
2025년 8월 11일, 나스닥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이 합의는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월 단행한 수출 금지 조치를 완화하는 대신 제시한 조건으로 알려졌다. 관세나 법인세가 아닌, 매출 총액의 15%를 ‘통행료(toll)’처럼 납부하는 방식이어서 산업계와 정책 전문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 조치는 국가안보·산업정책·조세정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례적 정책 실험으로 평가된다. 정부가 규제자(regulator)를 넘어 사실상 ‘상업적 파트너’로 등장해 미국 기업의 국제 매출에 직접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다.
합의의 구체적 내용
미 상무부 설명에 따르면, 이번 합의는 엔비디아의 ‘H20’ 등 고성능 AI 가속기와 AMD의 동급 제품을 대상으로 한다. 중국 고객사는 칩을 구매할 때 대금을 전액 제조사에 지급하지만, 제조사는 그중 15%를 분기별로 미 재무부 계정에 이체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수입관세’(import tariff)와 달리 수출기업이 자국 정부에 직접 납부한다는 점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미 행정부의 전략적 계산
“중국이 우리 기술을 완전히 차단당하면 자체 생태계를 더욱 빠르게 육성할 것이다. 차라리 ‘디그레이드된(degraded) 버전’이라도 미국 기술을 계속 쓰게 만들어 의존도를 유지시키는 편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 하워드 루트닉 미 상무장관
루트닉 장관의 발언은 이번 정책의 배경을 여실히 드러낸다. 미 정부는 더 이상 중국의 첨단 기술 접근을 전면 차단하기보다, 통제 가능한 수준의 접근성을 허용하면서도 중국 개발자들이 ‘미국 기술 스택(tech stack)’, 특히 엔비디아의 CUDA 플랫폼에 계속 묶여 있도록 유도하고자 한다. CUDA는 엔비디아 GPU에서 AI·과학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개발자 락인 효과가 크다.
따라서 15% 징수는 ‘보호무역’이 아니라 ‘통제된 개방(controlled engagement)’의 댓가라는 논리다. 정부 입장에선 국가안보 레버리지를 유지하면서도 재정 수입을 확보하는 일석이조 전략이다.
기업들의 고심과 선택
기업 측 손익 계산은 냉정하다. 엔비디아는 직전 회계연도 기준 170억 달러(전체 매출 13%)를, AMD는 62억 달러(24%)를 중국에서 벌어들였다. 4월 수출금지 직후 양사는 수십억 달러의 주문이 중단되는 직격탄을 맞았다.
“0달러의 100%보다, 거액의 85%가 낫다.”라는 한 투자 책임자의 말처럼, 15%의 마진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시장 접근권을 되찾는 편이 총이익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특히, AI 칩 수요가 폭증하는 중국 시장을 포기하면 경쟁사·현지 대체품에 영구적 지분을 내어줄 위험이 있다.
정책적·시장적 함의
이번 조치가 가장 큰 의미를 갖는 지점은 ‘정책 선례’다. 향후 미국 정부가 수출 통제 규정을 넘어 수익 공유 모델로 기업 활동에 개입할 가능성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이는 주권 리스크(sovereign risk)의 새로운 변종으로, 글로벌 기술기업에게 불확실성을 가중시킨다.
전문가들은 “정부는 더 이상 ‘도로의 규제자’가 아니라 ‘통행료 징수원’ 역할까지 자임했다”고 지적한다. 동일 논리가 다른 산업(전기차 배터리, 바이오, 위성통신 등)으로 확산될 경우, 미국 기업은 해외 판매 계약마다 백악관과 매출 배분 협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용어·배경 설명
CUDA: ‘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의 약자. 엔비디아가 2007년 공개한 병렬 컴퓨팅 소프트웨어 플랫폼·API 세트다. 개발자는 CPU 대신 GPU를 활용해 AI·과학·영상처리 연산을 수행할 수 있다. 일단 학습曲선을 넘어 도입하면 다른 플랫폼으로 갈아타기 어렵다는 잠금 효과(lock-in)가 크다.
통행료(tollbooth): 도로·교량 등 인프라 이용 대가로 징수하는 요금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이번 사례에서 미 정부는 ‘수출허가라는 도로’를 통과하는 대가로 매출 15%를 요구했다.
향후 전망
단기적으로는 엔비디아·AMD가 교두보를 유지하지만, 중국의 자립 가속화 역시 피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화웨이·바이두 등이 추진 중인 Ascend·Kunlun 생태계는 이미 국내 연구소·클라우드 기업을 중심으로 세를 넓히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존도 전략이 유효하려면, 미국 정부가 기술진화 속도를 계속 앞질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워싱턴 정가에서는 ‘수익 공유’ 모델이 의회 예산 편성과 무관하게 신규 재원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2026 회계연도부터 예상되는 징수액은 수십억 달러로, 국방·연구개발 예산의 일부를 충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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