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9개월 동안 연이어 터져 나온 정책 충격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경제가 예상보다 견조한 회복력을 보이고 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끝이 보이지 않는 정책 불확실성에 대한 피로감이 국제 금융 수장들의 귀국길을 무겁게 하고 있다.
2025년 10월 19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올 4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춘계회의 당시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에 대한 불안이 회의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추계회의 마감 무렵에는 정책 질서가 좀처럼 확정되지 않는 현실에 ‘피로’와 ‘경계심’이 한층 짙어졌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피티 디시야탓 태국은행(BoT) 부총재는 “해방의 날 이후 정책 담당자로서 상황을 파악하고 정책을 수립해 국민에게 설명하기까지 매우 고단한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불확실성 때문에 정책 여지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제는 몇 달 전 생각보다 더 회복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결코 안주할 여유는 없다.” — 일본 대표단 관계자
무역 갈등 재점화와 ‘뉴노멀’
회의 기간 동안 미·중 간 공방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 강화를 발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대(對)중국 수입품 전량에 대해 100% 관세를 재부과하며 즉각 대응했다. 세계 1·2위 경제 대국의 갈등이 재점화되면서, 참석자들은 ‘탈(脫)미·중’ 무역 구도를 모색하는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반목이 극심함에도 이번 회의가 “유례없이 건설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보여주기식 행동(theatricals)이 개입할 공간이 없다”고 말했다.
지역·양자 협력 강화 움직임
게오르기에바 총재와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미·중 갈등이 전면적 무역전쟁으로 확산되지 않은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두 사람은 오히려 다수 국가가 양자 또는 지역 협정을 통해 새로운 무역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니콜라 윌리스 뉴질랜드 재무장관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정학·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유럽연합(EU)이 11개국이 참여한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과 연계 방안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을 특히 주목했다.
라니아 알마샤트 이집트 기획·경제개발·국제협력부 장관도 “지역 협력 확대는 최근 글로벌 정세의 부산물이지만, 앞으로도 핵심 기제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
회의에서는 구조적 위험 요소도 집중 조명됐다. 과도한 대외 불균형, 사상 최고 수준의 부채, 비은행권 리스크, 인공지능(AI) 도입 충격 등이 대표적이다.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BoE) 총재는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서브프라임 모기지 버블을 조기 경고하지 못한 국제사회 경험을 언급하며 “이제는 뚜껑을 열어 내부를 들여다볼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시장 밸류에이션이 지나치게 높다(stretched valuations)”는 우려를 재차 제기했다. IMF는 불과 사흘 전 무질서한 시장 조정(disorderly correction) 위험을 경고하며, 무역전쟁·지정학 갈등·천문학적 재정적자를 주요 리스크로 꼽은 바 있다.
그녀는 IMF가 회원국 경제 분석과 부채 평가 방식을 전면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은 “무역 다변화가 필요하다”며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고치고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재상상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기후위기, 최대의 리스크로 부상
회의 참석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기후 변화를 ‘사기(con job)’라고 규정한 직후에도 기후위기가 가장 중대한 거시경제 리스크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IMF 국제통화금융위원회(IMFC) 회의에서 레셋하 크가냐고 남아공중앙은행 총재는 “기후 리스크는 보험·경제 펀더멘털·금융 안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무역협상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도 다른 파트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기후협상에서 떠나면 지구 전체가 더워지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는다.” — 레셋하 크가냐고 남아공중앙은행 총재
용어 설명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는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산업 ‘해방’을 명분으로 2025년 3월 전격 도입한 고율 관세 조치를 말한다.
*희토류는 전기차 배터리·첨단 전자제품에 필수적인 17개 희귀 금속 원소로, 중국이 세계 공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CPTPP(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는 미국이 탈퇴한 TPP를 11개국이 수정·발효시킨 다자 자유무역협정이다.
전망과 과제
전문가들은 ‘뉴노멀’로 불리는 현 상황을 단기간에 끝날 수 없는 구조적 변화로 해석하고 있다. 고관세·블록화·기후 위험이 공존하는 신질서 속에서 각국은 리스크 관리와 협력 체계를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결국 미·중 갈등이 촉발한 불확실성은 역설적으로 다자주의 복원을 위한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국제 공조를 당연시해선 안 된다”는 게오르기에바 총재의 경고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도 유효한 정책 나침반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