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에 휘말리며 지역 안보와 경제적 부담을 동시에 안게 됐다. 이번 갈등은 칠레 정부가 추진하거나 협의 중인 해저 디지털 케이블 사업을 둘러싸고 미국이 비자 제재를 단행하면서 촉발됐다. 해당 제재는 중국 기업들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케이블 사업에 연루된 칠레 관리 3명에게 부과됐다.
2026년 2월 25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주 말 미 국무장관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의 발표로 이 같은 비자 제한 조치를 공개했다. 루비오는 해당 조치가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칠레의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 대통령은 해당 비자 제재를 강하게 규탄하며, 자국이 “우리와 지역의 안보를 위협하는 어떤 행동도 촉진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칠레의 현 좌파 정부는 제재 대상자 중 한 명이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Juan Carlos Muñoz) 교통·통신부 장관임을 확인했으나 다른 두 명의 신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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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칠레 대사 브랜던 저드(Brandon Judd)는 월요일 기자들에게 비자 제한을 옹호하며
“우리는 지역의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조치를 취할 주권적 권리가 있다”
고 말했다. 이 발언은 AP통신의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이번 갈등은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라틴아메리카 정상회의 개최를 며칠 앞둔 시점이자, 칠레의 새 우파 정부가 출범하기 2주 전인 시점에서 발생해 외교적 파장을 키우고 있다.
칠레의 당선인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José Antonio Kast)의 행정부는 오는 3월 중도입성할 예정이며, 이번 사안은 카스트 정부의 대외정책·안보 조정 능력을 초기에 시험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분석가들은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역 내 중국의 전략적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진단한다.
전문가 평가와 배경
리스크 인텔리전스 기업 Verisk Maplecroft의 미주 담당 수석 분석가 마리아노 마차도(Mariano Machado)는 이번 긴장을 “교정된 경고(a calibrated warning)“라고 규정했다. 그는
“전략적 인프라 결정은 중립적인 입찰 문제가 아니라 지정학적 정렬의 선택으로 취급될 것”
이라며, 칠레가 향후 투자 유치 및 국제 협력에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저 통신 케이블은 국제 인터넷과 통신 인프라의 중추이며 국제 전화, 금융거래 등 광범위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여러 추정에 따르면 국제 트래픽의 최대 95%가 이러한 해저 케이블을 통해 전달된다. 따라서 케이블의 소유와 운영 주체는 단순한 상업적 사안이 아니라 안보·데이터 주권과 직결된 문제다.
해저 케이블이 갖는 의미
해저 케이블은 지상 기반 위성이나 무선 네트워크와 비교해 비용 효율성과 용량 측면에서 우위를 가진다. 또한 금융시장과 통신기업, 국가기관 등 주요 경제 주체들이 이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어, 특정 국가나 기업이 관리권을 갖는 경우 데이터 접근성·감시·차단 가능성과 관련된 안보 우려가 제기된다. 이번 사안은 그러한 우려들이 실제 정책·외교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과 미국의 반응
중국 주칠레 대사관은 미국의 제재를 두고 “칠레의 주권과 존엄성, 국가이익에 대한 명백한 경멸”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미국은 최근 몇 주 사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하는 일련의 조치를 강화해왔다. 예를 들어, 파나마 대법원은 홍콩 기반 CK 허치슨(CK Hutchison)의 운하 양단 항만 운영권 수여가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지역 안보 목표를 반영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미국은 쿠바의 공산당 정부에 대해 석유 제공 국가들에 관세 위협을 가하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에 대한 군사적 작전까지 수행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이어가고 있다.
정치·경제적 파급 가능성
이번 분쟁은 칠레의 향후 외국인 직접투자(FDI)와 디지털 인프라 사업의 ‘금융성(bankability)’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마차도는 투자 유치의 전제조건으로 명확한 거버넌스와 신뢰성 있는 보안 보증을 조기에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이후 수주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계약 단계에서부터 보안·관리 체계와 투명한 감독 메커니즘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금융시장 관점에서 보면, 지정학적 리스크 증가는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리스크 프리미엄을 높여 자금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의 수익성 평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특히 해외 투자에 의존하는 디지털·통신 분야의 프로젝트는 초기 금융조달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칠레가 목표로 해온 ‘디지털 허브’ 전략은 정치적 중립성과 효율적 규제체계를 보장하지 못하면 국제 파트너로부터 거부당할 위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장기적 기술 투자 유치와 관련 산업 생태계 형성이 지연될 수 있다.
용어 설명
해저 통신 케이블은 대륙 간을 연결하는 광섬유 케이블로, 전 세계 인터넷·통신 트래픽의 대부분을 운송한다. 이 케이블의 설치·운영 주체는 데이터 흐름과 보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도널드-몬로우 독트린( Donroe Doctrine )’은 기사에서 사용된 용어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Donald)과 19세기 미국의 몬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합성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트럼프 행정부가 서반구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중국의 진출을 견제하려는 정책적 태도를 풍자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전망 및 정책적 시사점
첫째, 칠레는 향후 외교에서 균형 외교의 필요성이 커졌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 입장과 중국과의 경제적 실리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인프라 사업에 대한 투명한 평가 기준과 안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국제 투자자와의 신뢰 확보를 위해 칠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하고,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 보안 검증과 거버넌스 조건을 명시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투자비용을 낮추고 금융조달 여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셋째,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미·중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은 지역국가들이 전략적 인프라 선택에 있어 외교적·안보적 고려를 필수 요소로 삼게 할 것이다. 따라서 기업과 투자자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프로젝트 평가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표준화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사안은 단순한 비자 제재 차원을 넘어 칠레의 외교·경제·안보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향후 카스트 행정부의 대응 방식과 3월 예정된 정권 교체 이후의 정책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