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 대기업 메르크앤드컴퍼니(Merck & Company Inc., NYSE: MRK)가 영국에서 진행하던 대규모 연구 개발(R&D) 계획을 전면 중단했다.
2025년 9월 11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메르크는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King’s Cross) 지역에 건설 중이던 약 10억 파운드(한화 약 1조7,000억 원) 규모의 차세대 연구 허브(Research Hub) 입주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해당 부지에서 예정됐던 800개의 신규 일자리는 사라질 전망이다.
이 결정은 회사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추진 중인 연간 30억 달러(약 4조 원)의 비용 절감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메르크는 영국 정부의 생명과학(Life Sciences) 분야 투자 부족과 신약에 대한 낮은 수가(의약품 가격) 책정을 핵심 근거로 제시했다. 회사 관계자는 “정부 지원 규모와 시장 보상 구조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은 연구 생태계와 인재 풀 측면에서 매력적이지만, 안정적인 투자 회수(ROI)를 확보하기에는 환경이 녹록지 않았다.” — 메르크 글로벌 R&D 부문 관계자
이미 상당 부분 공사가 진행됐던 건물도 결국 빈 shell 상태로 남게 된다. 메르크는 2022년 장기 임대 계약을 체결하고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해 왔다. 지난 7월 최종 철골 구조물을 설치하며 외형 공정을 마무리했지만, 입주 계약 철회로 건물 활용 방안이 불투명해졌다.
메르크는 이번 조치와 더불어 런던 세인트판크라스(St. Pancras)에 위치한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Francis Crick Institute) 내부 실험실도 2025년 말까지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연구원 125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는 유럽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학 연구 허브로, 기초 과학과 임상 응용 연구 간 ‘오픈 이노베이션’ 모델을 선도해 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번 발표는 영국 제약·바이오 생태계에 적잖은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의 투자 철회는 브렉시트(Brexit) 이후 약화된 영국의 연구·산업 기반이 재차 시험대에 올랐음을 방증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지적재산권(IP) 보호 체계는 우수하나, 국가 차원의 의료 서비스 예산 압박이 신약 가격 인하로 이어지며 기업 투자 유인을 떨어뜨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생명과학(Life Sciences)은 기초 생물학, 제약, 바이오테크·의료기기 산업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영역을 뜻한다. 미국·유럽 다국적 제약사들은 연구 거점을 다변화하며 비용 효율성과 규제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고 있는데, 이번 사례는 해당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메르크의 글로벌 비용 절감 전략은 오랜 임대 계약 재검토, 부동산 매각·축소, 조직 슬림화 등을 포함한다. 회사는 2024~2026 회계연도에 걸쳐 총 30억 달러 비용을 줄여 신약 파이프라인과 차세대 항암제·백신 연구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영국 정부는 최근 ‘라이프 사이언스 비전(Life Science Vision)’ 정책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민관 합동 200억 파운드 투자 의지를 내놨다. 그러나 국제적인 자본 유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산업계는 규제 일관성·환급 정책·세제 인센티브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 용어 설명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는 2016년 개소한 영국 국립바이오의학연구소로, 암·감염병·유전 질환 연구에 특화돼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스타트업·학계·대기업이 연구 데이터를 공유해 개발 속도를 높이는 협업 모델이다.
전문가 시각: 메르크의 철회는 영국이 글로벌 R&D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장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책 마련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영국 정부와 NHS(국가보건서비스)가 제약사와 ‘성과 기반 비용 보상’ 모델을 조속히 확립하지 못할 경우, 해외 자본 이탈이 가속화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편 메르크는 “영국 시장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며, 상업·임상시험 부문은 유지한다”고 설명했지만, 조기 연구(discovery) 단계 거점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인력·생태계 전반의 파급 효과가 불가피하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