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크(Merck & Co.)가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King’s Cross)에 건립하려 했던 벨그로브 하우스(Belgrove House) 연구센터 계획을 전면 철회하고 기존 미국 연구 거점으로 연구 기능을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결정은 약 125명의 연구 인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러한 철회 배경으로 회사는 “영국 정부가 생명과학산업 투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혁신 의약품과 백신의 가치를 과소평가해 왔다”고 지적했다.
2025년 9월 10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머크는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했던 벨그로브 하우스 입주 계획을 취소하고, 2025년 말까지 런던 바이오사이언스 이노베이션 센터(London Bioscience Innovation Centre)와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Francis Crick Institute)의 실험실도 철수할 예정이다.
1. 영국 사업 환경의 ‘도전적 현실’
머크는 공식 성명을 통해 영국 철수 결정이 “영국 정부가 생명과학 산업에 충분한 투자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특히
“영속적인 의약품 가치 평가 절하와 정책적 불확실성이 혁신 비용 회수 가능성을 저해해 왔다”
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규제 체계 혼란, 인허가 지연, 의약품 가격규제 강화 등이 글로벌 제약사의 영국 투자 매력을 낮췄다고 분석한다. 영국 정부가 추진해 온 ‘라이프 사이언스 비전(Life Science Vision)’ 정책이 실제로는 연구개발(R&D) 세제 혜택이나 가격 협상 구조 개선 등 구체적 인센티브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 미국으로 집중되는 R&D 투자
머크는 올해 초 1억 달러 규모가 아닌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를 투입해 델라웨어에 바이오의약품 및 면역항암제 ‘키트루다(Keytruda)’ 생산시설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해당 시설은 2028년 상업 생산, 2030년 임상 시험용 시료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 3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또 다른 10억 달러 규모 생산센터를 준공했다. 여기에 머크 동물의약 사업부는 캔자스주 연구·제조 시설 확장을 위해 8억9,500만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이는 2028년까지 미국에 총 90억 달러를 투입하는 대규모 투자 계획의 일부다.
3.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국 내 리쇼어링(Reshoring)
머크뿐만 아니라 다수 글로벌 제약사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관세·제조 이전 압박 이후 미국 내 생산과 연구 거점을 확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바이오 제조 세액공제 신설 등 미국 정부의 친(親)제조 정책도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
제약산업 분석가들은 “연구·임상·상업화 전 주기 통합을 지원하는 미국의 정책적 기회비용이 영국·EU 대비 급격히 낮아졌다”고 해석한다. 즉, 비용 이전이 아닌 가치 창출 극대화 측면에서 미국이 유리한 선택지로 부상한 셈이다.
4. 영국 정부의 대응 과제
영국 정부는 지난해 R&D 세제 공제율을 13%에서 20%로 상향 조정했으나, 가격 규제(브랜드 의약품 볼륨협정·VPAS) 부담이 여전히 크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한, 승인기관(MHRA)의 인허가 속도 개선, 약가 협상 구조 혁신 등 복합적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참고: VPAS(Voluntary Scheme for Branded Medicines Pricing and Access)는 브랜드 의약품 총매출 증가율을 연 2% 수준으로 제한하고, 초과분을 제조사가 정부에 환급하도록 하는 영국 자율 협약이다.
5. 머크 철수 결정의 전망과 파급효과
이번 철수는 단순한 사업장 이전을 넘어 영국 생명과학산업 생태계 경쟁력 약화 우려를 내포한다. 특히 킹스크로스를 중심으로 한 ‘Knowledge Quarter’ 클러스터의 연구·스타트업 협력 네트워크가 일부 단절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면, 머크 내부적으로는 연구 거점 집중화로 규모의 경제 및 혁신 속도 가속이 기대된다. 이미 키트루다의 연 매출이 250억 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후속 차세대 면역항암제·ADC(항체-약물 결합체) 파이프라인 효율화가 관건으로 꼽힌다.
전문가 의견에 따르면, “글로벌 상위 제약사들이 R&D 허브를 선별적으로 운영하는 흐름 속에서, 정부 차원의 규제 유연성과 인센티브 패키지가 결정적”이라며 “영국이 규제 혁신과 투자 유치에서 실질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캠브리지 과학회(Cambridge science cluster)’마저 투자 매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6. 이해를 돕는 용어 설명
리쇼어링(Reshoring)은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연구 기능을 자국으로 다시 옮기는 전략을 의미한다. 관세, 공급망 안정성, 정부 지원 등이 주요 동인이다.
ADC(항체-약물 결합체)는 항체에 세포독성 물질을 연결해 암세포만 표적 공격하는 차세대 항암 플랫폼으로, 글로벌 제약사 간 기술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7. 기자의 전문적 통찰
머크의 런던 철수는 단순히 사업 환경을 이유로 한 ‘코스트 절감’ 조치로 보이기보다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연구·임상·제조를 하나의 대륙 내에서 통합하려는 구조적 변화로 읽힌다. 미국은 막대한 내수시장, 규제 일원화, 세제 혜택, 고급 인재 풀을 통해 ‘원스톱 신약 개발 인프라’를 제공하며, 그 결과 머크뿐만 아니라 화이자, 존슨앤드존슨, 암젠 등도 대규모 미국 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이 여전히 세계적 연구 기초 과학 인프라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 경쟁력 측면에서는 ‘정책적 불리함’이 치명적 약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영국 정부가 의약품 가격협상 메커니즘을 유연화하고, 임상시험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며, 장기적 세제 인센티브를 강화하지 않는 한 글로벌 R&D 허브 지위는 점차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번 사례는 ‘정책·규제·시장 가치 평가’가 연구개발 투자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절대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책 입안자들은 단기 예산 절감을 위한 가격규제 강화가 장기적으로는 혁신 투자 이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