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미국 제약사 머크(Merck & Co.)가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Kings Cross)’ 인근에 조성 중이던 새 연구센터 계획을 전격 철회함에 따라, 영국 정부가 자국의 투자 유치 성적표를 적극 방어하고 나섰다.
2025년 9월 11일, 로이터(Reuters) 통신 보도에 따르면, 머크는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이미 공사에 돌입한 해당 연구소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겠다고 전날(10일) 밤 성명을 통해 밝혔다. 머크는 성명에서 “영국이 생명과학 산업 투자 부진 문제 해결에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며 “연속된 정부가 혁신 의약품과 백신의 가치를 과소평가해 왔다”고 철회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결정은 영국 최대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가 북부 잉글랜드 백신 공장 건립 계획(4억5,000만 파운드 규모)을 취소한 데 이어 제약업계에서 잇따라 나온 ‘엑소더스(exodus)’ 사례라는 점에서 산업계 전반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와 업계 간 약가(藥價) 갈등이 겹치면서, 영국 생명과학 생태계의 입지에 경고등이 켜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 영국 정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
영국 정부 대변인은 “딜로이트(Deloitte) 조사 결과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투자 매력도가 높은 국가’로 꼽혔다”며 “그러나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민간 자본 수십억 파운드를 끌어내기 위해 5억2,000만 파운드(약 7억300만 달러) 규모의 제조업 펀드를 조성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머크 직원들에게 우려스러운 소식일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정부는 올해 초 발표한 ‘산업 전략(Industrial Strategy)’에서 생명과학을 8대 핵심 산업 가운데 하나로 지정했지만, 업계 반응은 엇갈렸다. 업계에서는 규제·세제 인센티브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 ‘트럼프 리스크’도 변수… “미국 내 생산 압력 가중”
머크 결정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건 ‘리쇼어링(Reshoring)’ 정책, 즉 미국 내 생산 확대 압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산 의약품 구매 확대를 유럽연합(EU)과 영국에 요구하며, 제약 분야 관세 부과 가능성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실제로 제약업계 로비단체 ABPI(영국제약산업협회)는 영국의 해외직접투자(FDI) 유치 순위가 2017년 세계 2위에서 2023년 7위로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협회는 “영국이 제약 투자 대상국 리스트에서 점차 제외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이 제약 투자처로서 고려 대상에서 점점 제외되고 있다.” — ABPI 성명
영국은 자국 NHS(국가건강서비스)에 재투자해야 하는 매출 환급 제도를 두고 제약사들과 수년째 협상 중이다. 그러나 지난달 협상이 결렬되면서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
■ 용어·배경 설명
• 리쇼어링(Reshoring) : 글로벌 기업이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시설을 자국으로 되돌리는 전략이다. 미국은 제조업 일자리 회복을 목표로, 제약·반도체 등 전략 산업의 리쇼어링을 독려하고 있다.
• 약가 환급(Rebate) 제도 : 영국 정부가 제약사에 자국 매출 일부를 NHS에 돌려주도록 의무화하는 제도다. 제약사들은 이를 ‘숨은 세금’에 가깝다며 불만을 제기해 왔다.
■ 전문가 시각과 전망
업계 관계자들은 머크의 결정을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투자 규모 자체보다 세계 최대 제약사 가운데 하나가 영국 시장에서 발을 빼기로 했다는 점이 투자 심리에 미치는 부정적 파급력이 크다는 이유다. 또한 아스트라제네카 사례와 맞물려 “비슷한 결정을 고려 중인 다국적 제약사들이 줄을 이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영국 정부가 제조업 펀드 확대, 세제 인센티브 보강 등 후속 조치를 서두른다면 ‘투자 엑소더스’ 흐름을 일부 차단할 수 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EU 탈퇴(Brexit) 이후 독자적인 규제 체계를 수립할 기회를 활용해, 신약 허가·임상 절차를 간소화한다면 오히려 ‘규제 샌드박스’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미·영 통상 협상과 NHS 약가 협상이 투자 심리를 좌우할 변수로 꼽힌다. 중장기적으로는 연구·개발(R&D) 세액공제 확대와 제조 인프라 투자가 병행돼야 영국이 글로벌 생명과학 허브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번역·구성: AI비즈니스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