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 성장 속도 조절…중국 AI 칩 확보 전략에 복병

말레이시아가 급증하던 데이터센터 투자 흐름을 제어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인공지능(AI) 칩 수급 전략에도 복잡성이 더해지고 있다. 현지 업계와 분석가들은 이 같은 조치가 중국의 첨단 AI 역량 고도화에 필수적인 고성능 칩 접근성을 제한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2025년 9월 12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는 그동안 값싼 토지·전력 비용과 견조한 AI 수요 전망을 바탕으로 미국 빅테크 기업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구글)은 물론 중국의 텐센트, 화웨이, 알리바바까지 대거 유치하며 ‘동남아 데이터허브’로 부상해 왔다. DC바이트(DC Byte)에 따르면 동남아 5대 성장 시장에서 현재 건설 중인 데이터센터 용량의 3분의 2 이상이 말레이시아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최근 전력망 용량·수자원 한계와 더불어 워싱턴의 압박이 겹치며 확장 속도가 둔화하는 모습이다. 미국은 첨단 AI 칩이 자국의 수출 통제를 우회해 중국 군사·AI 개발에 쓰일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에 말레이시아는 7월부터 NVIDIA 등 미국산 고성능 칩의 모든 수출·환적·통과에 허가제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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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벨트앤로드”와 중국의 해외 데이터센터 전략

2021년 중국 정부는 자국 데이터센터 기업의 해외 진출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참여국을 우선 대상으로 삼았다. 말레이시아 역시 BRI 서명국으로, 지난 4월 시진핑 주석의 방문 이후 양국 공동성명엔

“데이터 연계, 5G 인프라, AI 협력을 확대한다”

는 문구가 명시됐다.

중국 1위급 사업자인 GDS홀딩스는 2년 전 싱가포르 접경 지역인 조호르주에 초대형(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캠퍼스를 가동하며 대규모 증설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미·중 기술갈등이 격화되자, GDS는 올해 1월 해외 데이터센터 담당 싱가포르 법인을 ‘데이원(DayOne)’으로 분사시키고 지분을 단계적으로 축소했다. 조호르주 데이터센터 개발 조정 부책임자 리팅한(Lee Ting Han)은 “중국 기업들이 브랜드를 재정비(rebranding)하는 이유는 고객 기반 다변화와 무역 긴장 대응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데이터센터 단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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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르주 ‘데이터 골드러시’의 명암

싱가포르는 전력·수자원 부담으로 2019~2021년 3년간 신규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을 시행했으며, 2022년부터도 300메가와트(MW)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이로 인해 저비용·저지연(latency) 연결이 가능한 국경 인접지 조호르가 대체 투자처로 급부상했다.

나이트프랭크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12월 기준 조호르에는 가동 중인 데이터센터 12곳(369.9MW)이 있으며, 추가로 28곳(898.7MW)이 계획돼 있다. 주(州) 수상에 따르면 2025년 2분기까지 승인된 42개 프로젝트의 투자액은 1,644억5,000만 링깃(약 390억8,000만 달러)으로, 말레이시아 전체 가동 IT 용량의 78.6%를 차지한다.

하지만 조호르는 지난해 데이터센터 심의위원회를 도입해 2024년 말 기준 신청 중 약 30%를 환경·에너지 지속가능성 미달로 반려했다. 리 부책임자는 “절차 숙지도가 높아지며 승인률은 올라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미국 수출통제와 ‘규제의 회색지대’

미 상무부는 중국 외부 데이터센터가 AI 칩을 구매해 중국 본토에서 AI 모델을 학습·군사 활용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밀러 & 슈발리에(Miller & Chevalier) 변호사 출신 콜먼 그리핀은 “말레이시아가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마무리하려는 상황에서,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심사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중국과 교역규모가 가장 큰 국가다. 이번 허가제는 U.S. 칩의 ‘현지 사용(local use)’ 목적 반입에는 여지를 두지만, 점차 늘어나는 감시망과 행정비용은 중국계 데이터센터 사업 확장에 실질적 제약이 될 전망이다.


알아두면 좋은 용어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Hyperscale DC)는 수만 대 이상의 서버 랙을 운영하며 초고속·대용량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규모 시설을 뜻한다.
지연(latency)은 데이터가 사용자와 서버 간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해, 지리적 거리가 짧을수록 낮아진다.
메가와트(MW)는 전력 용량 단위로 1MW는 100만 와트다. 데이터센터 용량 지표로 활용된다.
일대일로(BRI)는 중국이 2013년부터 추진 중인 글로벌 인프라·무역 네트워크 구축 구상으로, 참여국에는 저금리 차관·건설 프로젝트가 제공된다.


전망과 시사점

전문가들은 동남아, 특히 말레이시아가 “중국 AI 생태계의 완충지(buffer zone)” 역할을 해왔으나, 미국의 수출통제 강화로 그 공간이 좁아질 것으로 본다. DC바이트의 시니어 애널리스트 비비안 웡은 “동남아는 지리적 근접성·정치적 완충 덕에 중국업체에게 매력적인 시장이지만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이어진 관세 및 규제 리스크를 계속 안고 있다”고 평가했다.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가 전력·수자원 지속가능성 기준과 미국 수출통제라는 ‘이중 트랙’을 유지하는 한, 중국계 데이터센터 투자 모멘텀은 예년만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말레이시아가 제시한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조호르의 지리적 장점은 에너지 효율·친환경 설계를 갖춘 프로젝트에게는 여전히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