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 유럽중앙은행(ECB) 전 총재이자 전 이탈리아 총리인 마리오 드라기가 “유럽연합(EU)은 글로벌 경쟁에서 점점 뒤처지고 있으며, 각국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드라기는 12개월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요청으로 경쟁력 강화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으며, 이번 발언에서 EU의 성장 모델이 빠르게 소실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脆弱성(vulnerabilities)이 누적되고 있으며 필요한 투자를 조달할 명확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2025년 9월 16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드라기는 브뤼셀에서 열린 행사에서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을 비롯한 EU 고위 관계자들에게 연설했다. 그는 EU가 야심 찬 계획들을 세웠으나 “속도가 너무 느리고, 각 정부가 ‘결정적 순간’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지금처럼 관성에 몸을 맡긴다면 뒤처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다른 길을 가려면 속도·규모·강도가 전혀 달라야 한다. 각국이 분열이 아니라 공동 행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 관세와 중국 무역적자 압박
드라기는 미국의 대(對)EU 관세와 중국과의 무역수지 악화를 주요 도전 과제로 꼽았다. 특히 2024년 12월 이후 EU의 대중(對中) 무역적자가 20% 확대됐다는 점을 들어 “외부 압력이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인공지능·데이터센터 투자 격차
AI(인공지능) 분야에서도 격차가 뚜렷하다. 드라기는 “EU는 기가팩토리(gigafactory) 구축과 데이터센터 용량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핵심 기초모델(foundation model) 생산 실적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2024년 미국이 40개, 중국이 15개의 대형 기초모델을 출시한 반면, EU는 3개에 그쳤다.
※ 용어 설명1
• 기가팩토리: 배터리·반도체 등 대량 생산시설을 일컫는 신조어.
• 기초모델(Foundation Model): 대규모 데이터 학습으로 다양한 AI 서비스를 ‘기초’부터 구현할 수 있는 범용형 인공지능 모델.
드라기는 “확장(스케일업)을 가로막는 규제와 데이터 이용 규칙을 손봐야 하며, 산업 현장에 AI를 채택하도록 유도할 추가 행동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 에너지 가격 및 구조적 취약성
에너지 가격도 큰 제약 요소다. EU의 천연가스 가격은 미국 대비 거의 4배에 달하며, AI 전력 수요는 2030년까지 70% 증가할 전망이다. 드라기는 “높은 전력비가 기술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EU는 구조적 문제 해결이 시급하지만, 지금까지 각국이 취한 주된 조치는 가격 보조금 제공 같은 ‘임시 처방’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드라기는 마지막으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할수록 민간 자본의 참여가 확대되고, 공공 자금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래된 ‘금기(taboo)’가 깨질 것이지만, 다른 지역은 이미 그 과정을 거쳤다”
며 근본적 구조개혁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기자 해설: 왜 지금 ‘속도’가 중요한가?
전문가들은 드라기의 발언이 단순한 경고를 넘어 “사실상의 행동 촉구”라고 평가한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제조 2025 같은 국가 전략을 통해 보조금, 세제지원, 규제 완화를 총동원하고 있다. 반면 EU 내부는 회원국 이해관계와 재정 규율에 묶여 ‘합의 중심’ 프로세스가 지연되기 쉽다.
특히 AI·반도체·배터리처럼 규모의 경제가 절대적인 산업은 초기 투자 타이밍이 승패를 좌우한다. 드라기가 “속도·규모·강도”를 반복 언급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민간 자본 유입 문제다. 유럽 증시는 미국 나스닥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P/E(주가수익비율)와 성장 기대치를 보이는데, 이는 규제 리스크와 정책 불확실성이 투자 심리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드라기가 “개혁이 민간 자본을 끌어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자본비용을 낮추고 혁신기업의 스케일업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요컨대, EU가 ‘개별 보조금’이라는 임시 처방에 머무르면 국제 경쟁력 회복은 요원하다. 공동 투자 플랫폼 구축, 통합 자본시장 확대, 규제 조화 등 구조적 처방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드라기는 거듭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