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정부가 2020년 3월 디폴트를 선언한 이후 바닥까지 추락했던 국제 국채 가격이 최근 1년 동안 4배 가까이 상승하며 투자자들의 관심이 다시 집중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 이후 새 내각이 출범하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협상이 진전을 보였다는 기대감이 맞물린 결과다.
2025년 9월 18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레바논의 디폴트 채권은 지난해 1달러당 6센트 수준이던 것이 최근 24센트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채권 재조정(restructuring) 이후 실제로 투자자가 손에 쥘 ‘회수 가치(recovery value)’ 추정치가 워낙 넓게 분포해 있어, 추가 상승 여력에는 제한이 있다는 관측이 동시에 제기된다.
회수 가치란 채권자가 채무 조정 이후 최종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을 의미하며, 국가·기업의 회생 가능성, 이자 지급 여부, 채무 탕감(haircut) 비율 등에 따라 달라진다. 전문가들은 회수 가치가 확정되려면 레바논 의회가 ‘금융 공백(financial gap)’, 즉 현지 은행들이 떠안아야 할 손실 규모를 법으로 확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정부가 채권자에게 배분할 수 있는 재원을 보다 명확히 추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상승, 그러나 회수 가치 전망은 널뛰기
올해 2월 새 내각이 출범하자 채권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정치 교착 상태가 2년 넘게 지속되면서 악화했던 경제 상황이 정상화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인프라 재건 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에도 베팅했다.
하지만 일부 채권 전문가는 상승세가 과속이라고 경고한다. 자산운용사 나인티원(Ninety One)의 채권 애널리스트 로저 마크는 "현 시점에서 회수 가치는 20~40센트까지 극단적으로 넓은 범위로 시나리오를 구성할 수 있다"며 "향후 1년 이내 IMF 협정에 실패할 경우 더 비관적인 그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IMF는 6월에 레바논이 대출 협상 진전에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고, 협상팀은 이달 베이루트를 재방문해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고객 메모에서 "최대 40센트까지 회수될 수 있지만, 부정적 시나리오에서는 23~26센트로 떨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 시각
“현재 가격은 12~18개월 내 긍정적 결말이 도출될 확률이 상당하다는 가정이 전제돼 있고, 하방 위험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 파룩 수사(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
채권자단을 대표하는 그룹은 로이터의 논평 요청에 응답을 거부했다.
부실 확대의 뿌리: 99% 가치 증발한 통화와 은행 손실
레바논은 2020년 3월 약 310억 달러 규모의 국제채를 상환 불이행하며 국가부도에 빠졌다. 이후 3년 넘게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레바논 파운드 환율은 99%까지 붕괴됐고, 은행의 대차대조표는 사실상 공중분해됐다.
지난해 채권 가격이 6센트 밑으로 추락했을 때, 일부 투자자는 ‘초저가 매수 기회’로 평가했다. 골드만삭스의 파룩 수사는 이를 ‘비대칭적 포지션(asymmetry)’이라고 불렀다. 극단적 저가에 매수한 투자자 입장에서는 손실 리스크가 제한적이지만, 협상이 성공할 경우 큰 폭의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과제는 결코 작지 않다. 레바논 중앙은행(BDL)은 최근 글로벌 금리 상승이 국제채 구조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높은 금리는 할인율 상승으로 회수 가치 산정을 깎아먹고, 정부 재정의 이자 부담을 가중시킨다.
‘금융 공백’이란 무엇인가?
금융 공백(financial gap)은 은행의 부채와 자산 간 차이를 뜻한다. 쉽게 말해 은행들이 예금자에게 갚아야 할 돈보다 실제로 보유한 자산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이 격차가 클수록 정부나 중앙은행, 채권자가 떠안아야 할 부담이 커진다.
IMF는 2년 전 레바논 중앙은행이 600억 달러에 달하는 음(-)의 자본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추정치 국제금융연구소(IIF)는 올해 3월 보고서에서 2022년 말 764억 달러였던 부정적 자본이 484억 달러까지 축소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최종 수치는 의회가 손실 분담 구조를 확정하고, 회계 감사를 거쳐야만 공개될 전망이다.
채권 회수 가치는 또한 143억 달러(제이피모간 추정)에 달하는 미지급 이자(past due interest)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채권자들이 얼마나 큰 헤어컷(haircut)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시장 밸류에이션과 비교 우위
윌리엄블레어(William Blair)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이베트 밥은 "채권 가격이 22센트 이상이면 과거 회수 가치 추정치 상단 근처"라며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등 고위험 국채도 상승해 레바논이 상대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골드만삭스의 수사는 "EM(신흥국) 전반에서 스프레드가 좁아진 상황에서 변동성이 큰 매력적 기회가 많지 않다"며 "따라서 위험 성향이 높은 자금이 레바논 채권으로 몰릴 여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알아두면 좋은 용어 설명
Recovery Value(회수 가치)는 채무 재조정 이후 채권자가 실제로 되돌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금액을 의미한다. 보통 달러당 몇 센트로 표시하며, 채무 감면 폭·채무 이행 일정·이자 지급 여부 등이 주요 변수다.
Haircut(헤어컷)은 채권 원금 또는 이자를 일정 비율만큼 삭감하는 조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 100달러 원금을 60달러로 줄인다면 40% 헤어컷을 적용한 것이다.
Financial Gap(금융 공백)은 금융기관의 실제 자산과 부채 간 격차를 의미한다. 마이너스(-)가 클수록 자본잠식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Past Due Interest(미지급 이자)는 디폴트 이후 지급하지 못한 이자의 누적액을 가리킨다. 채권 재조정 시 이를 원금에 더하거나 별도로 할인해 지급하기도 한다.
전문가 관점
현재 레바논 채권은 1년 전과 비교해 큰 폭으로 올랐으나, 의회의 은행 손실법 통과 시기, IMF 협상 결과, 글로벌 금리 향방 등 변수에 따라 상방·하방 리스크가 모두 큰 종목으로 분류된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투자자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지만, 구조조정 지연이 장기화될 경우 연초 저점 재시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신중론이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