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와 미국 휘발유 선물 가격이 2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위한 합의를 모색하고 있다고 전하며, 미국이 추가 대(對)러시아 에너지 제재를 보류할 가능성이 부각되자 투자자들이 공급 증가를 선반영한 결과다.
2025년 8월 8일(현지시간), 나스닥닷컴 보도에 따르면 9월물 WTI(서부텍사스산중질유) 선물은 배럴당 0.30달러(−0.47%) 하락한 63.45달러 선에서, 9월물 RBOB 휘발유 선물은 갤런당 0.014달러(−0.07%) 내린 2.24달러 선에서 거래됐다.*가격은 장중 변동치를 반영
가격 하락의 결정적 요인은 지정학적 리스크 완화 기대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루한스크(도합 ‘돈바스’ 지역) 전부와 크림반도 영유권을 조건으로, 헤르손·자포리자주에서 현 전선을 유지하며 공세를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전쟁이 끝날 경우 대러 에너지 제재가 해제될 가능성이 높아져 국제 원유 공급망에 상당한 물량이 복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달러 약세와 뉴욕 증시 강세가 유가 하락폭을 일정 부분 제한했다. 달러 인덱스가 3주래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원유 결제 통화인 달러 대비 구매력이 개선됐고, 주식시장 랠리는 글로벌 경제 회복 기대를 반영해 석유 수요 심리를 지지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러시아가 8일까지 휴전에 응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하는 국가에 신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어 6일에는 인도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두 배 인상했다. JPMorgan Chase는 ‘트리플 디짓(100% 이상)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OPEC(석유수출국기구) 여유 생산능력 한계 탓에 공급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OPEC+ 증산과 공급 과잉 우려
OPEC+는 9월 1일부터 일일 54만7,000배럴 추가 증산을 승인했다. 동맹국들은 2026년 9월까지 2년간 감축했던 물량 220만 배럴/일을 순차적으로 복귀시키는 로드맵을 유지하고 있다. 단체는 “수요 상황에 따라 증산 중단·감축 재개·공급 복귀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것”이라 밝혔지만, IEA(국제에너지기구)는 재고가 일평균 100만 배럴씩 쌓이고 있다며 2025년 4분기 공급과잉(소비 대비 1.5%)을 경고했다.
유럽연합의 추가 제재
EU는 러시아의 군사 행위를 이유로 20개 러시아 은행을 SWIFT에서 퇴출하고, 다른 국가에서 정제된 러시아산 석유 제품에 대한 제재를 도입했다. 로스네프트가 지분을 보유한 인도 정유사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늘 선대’(Shadow Fleet) 소속 유조선 105척도 추가 제재 대상이 됐다. 이에 따라 제재된 선박은 400척을 넘어섰다.
미국 내 공급 지표
EIA(미 에너지정보청) 주간 보고서에 따르면 8월 1일 기준 미국 원유 재고는 4억4,300만 배럴로 5년 평균 대비 6.5% 낮았다. 휘발유 재고는 0.3% 부족, 증류유(경유 등) 재고는 16.1% 부족했다. 같은 기간 미국 원유 생산량은 주간 0.2% 감소한 1,328만4,000배럴/일로, 2024년 12월 기록한 사상 최고치(1,363만1,000배럴/일)보다 소폭 낮다.
베이커휴즈의 리그 카운트에 따르면 8월 1일 주간 미국 내 가동 중인 원유 시추기는 410기로 전주 대비 5기 줄어 3.75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2년 12월 627기에서 2년 반 만에 35% 이상 감소한 수치다.
글로벌 해상 재고 추세
선박 위치 데이터 업체 보텍사(Vortexa)는 8월 1주차 7일 이상 정박한 유조선 적재량을 7,912만 배럴로 집계했다. 전주 대비 15% 감소해 단기적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
용어 풀이와 배경 설명
WTI(West Texas Intermediate)는 미국 서부 텍사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국제 원유 벤치마크다. 달러로 거래되며, 브렌트유와 함께 글로벌 원유 가격 지표로 활용된다.
RBOB(Reformulated Blendstock for Oxygenate Blending)은 미국 환경규제에 맞춰 산소 첨가제를 섞기 전 단계의 가솔린 원료를 뜻한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갤런 단위로 거래돼, 미국 휘발유 현물 가격의 지표가 된다.
OPEC+는 본래 OPEC 13개 회원국에 러시아·카자흐스탄 등 10개 비(非)회원 산유국을 더한 협의체다. 2016년 이후 공동 감산·증산 정책으로 시장 변동성을 조절해 왔다.
SWIFT는 글로벌 은행 간 결제망이다. 국가 또는 은행이 퇴출될 경우, 달러 결제·외환 거래 등이 사실상 차단돼 국제 무역에 큰 차질이 발생한다.
기자 관점 및 시사점
지정학적 리스크 완화와 OPEC+ 증산이 맞물리면서 단기적으로 공급 확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카드와 EU의 제재 강화가 동시에 존재해, ‘정책 변수’가 가격 방향성을 결정할 핵심 요인이 될 전망이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 합의로 동결되더라도 미국 의회의 초당적 대러 제재 기조와 EU 회원국 간 이해관계가 복잡해, 제재 전면 해제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많다. 이에 따라 시장은 ‘공급 확대’와 ‘정책 불확실성’ 사이에서 변동성 장세를 이어갈 공산이 크다.
투자자 입장에선 베이스메탈·농산물 등 타 원자재 가격과 달러 인덱스 흐름, 나아가 중국의 경기 부양 정책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원유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기대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