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인공지능(AI) 분야에서 ‘혁신의 선두’가 되지 않더라도, 산업 전반에 AI를 적용하는 전략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가 2026년 2월 워싱턴 연설에서 밝혔다.
2026년 2월 23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라가르드는 AI가 단순히 최첨단 모델(frontier models) 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보다 제조업과 산업 프로세스 전반에 걸쳐 이 도구들을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것이 더 큰 경제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라가르드는 특히 유럽이 제조업에서 AI와 빅데이터 활용, 로봇 배치 측면에서 미국 기업들을 앞서고 있다는 설문 결과를 인용하며 유럽의 산업 기반이 오히려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은 잠자는 거인이다. 잠재력은 엄청나지만 이를 열어주는 변화가 필요하다(Europe is a sleeping giant. Its potential is immense, but the changes needed to unlock it are not).”
라가르드는 유럽이 구조적 약점을 장기간 방치해온 문제를 위기 상황이 아닌 평상시에도 동일한 결단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낙관 때문에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비용(the cost of not acting)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으며, 필요한 조치들이 지역 내 역량으로 충분히 실행 가능하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핵심 수치와 투자 여력
라가르드는 투자자들이 이 가능성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유럽 가계가 미국 가계와 동일한 수준의 예금 대비 금융자산 비율(deposit-to-financial assets ratio)을 맞춘다면, 최대 8조 유로(€8조, 미화 약 9.4조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장기 시장 기반 투자로 재배치될 수 있으며, 연간 흐름으로는 €3,500억(약 3,700억 달러) 이상이 장기 투자로 유입될 잠재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용어 설명: ‘프론티어 모델(frontier models)’ — 이 용어는 연구·개발 단계에서 최첨단의 대규모 인공지능 모델을 가리키며, 대용량 데이터와 막대한 컴퓨팅 자원을 투입해 학습된 모델을 뜻한다. 반대로 산업 현장에의 ‘적용(application)’은 기존의 제조·공급망·서비스 프로세스에 AI를 통합해 생산성과 효율을 빠르게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어 설명: ‘예금 대비 금융자산 비율(deposit-to-financial assets ratio)’ — 가계가 보유한 전체 금융자산에서 예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이 비율이 낮아지면 예금에서 주식·채권·펀드 등 장기적 시장 기반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할 여지가 커진다.
배경과 비교: 생산성 약화 원인과 국제적 위치
라가르드의 발언은 유럽이 AI 도입과 혁신 경쟁에서 미국에 뒤처져 있다는 일반적 인식 속에서 나왔다. 전 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의 2024년 보고서는 유럽의 낮은 생산성 증대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첫 번째 디지털 혁명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보고서는 미국과 중국이 디지털 전환의 초기 파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면서 이후 기술·자본 축적 측면에서 앞서나갔다고 평가했다.
라가르드는 그러나 유럽의 제조업 기반이 AI를 포함한 디지털 도구를 응용하는 데 유리한 출발점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특히 제조업의 디지털화, 로봇 공정의 확대, 빅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등은 유럽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분야라고 평가했다.
정책·시장 파급 효과와 전망
라가르드의 진단은 정책과 자본시장에 다음과 같은 실질적 함의를 제시한다. 첫째, 공공·민간의 자본 재배분이 촉진되면 장기적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에 대한 자금 조달이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한 연간 €3,500억 수준의 신규 자금 유입 시나리오는 유럽의 자본시장 심화 및 기업의 설비투자 확대를 통해 중장기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
둘째, AI의 산업적 적용은 단기적으로는 노동구조와 고용 패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제조 공정 자동화와 고도화는 반복업무의 축소를 가져오지만, 데이터 분석·AI 시스템 설계·로봇 유지보수 등 새로운 고숙련 일자리를 창출할 전망이다. 따라서 노동시장 전환을 지원하는 재교육(retraining)과 사회안전망 강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셋째, 금융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대규모의 민간 자금이 주식·채권·벤처자본 등 시장 기반 상품으로 이동하면 유럽 증시의 유동성 개선과 중소기업(MSME) 자금조달 여건 개선이 기대된다. 이로 인해 기술·산업 전환에 필요한 리스크 자본이 보다 원활히 공급될 가능성이 있다.
정량적 추정 — 보수적 가정 하에서라도 연간 €3,500억의 장기 투자 유입은 유럽연합(EU) 전체 GDP 대비 투자비율을 수년 내 0.2~0.5퍼센트포인트(p)를 상향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는 생산성 개선과 장기 성장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몇 년 내 투자 확대가 기술 도입과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될 경우 잠재성장률에 대한 상향 압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책적 제언 및 실천 과제
라가르드의 메시지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구조적 개혁·자본 재배치·인력 재교육의 병행을 촉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의 실행이 요구된다. 첫째, 규제·세제·투자 인센티브를 통해 민간의 장기투자를 촉진해야 한다. 둘째, 산업별로 AI 적용 가속화 프로그램과 표준화된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해 중소기업까지 기술 혜택이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노동전환을 지원하는 교육·훈련 프로그램과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기술도입의 사회적 비용을 완화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치들이 병행될 경우, 유럽은 연구개발의 최첨단 경쟁에서 단독으로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실물경제 전반에 걸친 AI의 확산을 통해 실질 경제 성과를 끌어올리는 경로로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라가르드의 요지다.
마무리
라가르드의 발언은 유럽의 정책결정자와 시장참여자들에게 명확한 선택지를 제시한다. 즉, 최첨단 AI 모델 개발의 경쟁구도 속에서 모든 자원을 집중하기보다, 기존의 산업·제조 역량을 활용해 AI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전략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시장 구조, 노동시장 정책, 산업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실현 가능한 전략이며, 실행 여부가 향후 유럽의 경제경쟁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