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미국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 DOJ)가 이번 주 주(州) 정부, 지방 자치단체 및 비영리 단체에 대해 ‘연방 보조금으로는 불법 체류 이주민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지침을 전격 통보했다. 로이터가 입수한 내부 이메일과 복수의 보조금 수혜 기관(grantee) 인터뷰에 따르면, 법무부는 기존 보조금까지 소급(遡及) 적용해 지출 용도를 제한하며 강경 기조를 분명히 했다.
2025년 8월 21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번 조치는 법무부 산하 사법 프로그램국(Office of Justice Programs, OJP)이 같은 날 보낸 이메일을 통해 공식화됐다. OJP는 “1연방 정부가 제공한 어떤 보조금도 ‘추방 가능(removable) 이주민’ 또는 ‘미국 내 불법 체류(unlawfully present)’ 신분인 사람의 변호‧소송 비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다만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명령(PFA)과 같이 법률이나 법원 명령이 요구하는 특정 절차에 한해 예외를 허용했다.
민주당 주(州) 21곳, 같은 날 법무부 상대 소송 제기
흥미롭게도 같은 날 뉴욕, 캘리포니아 등 민주당 주지사가 이끄는 21개 주는 연방법원에 법무부를 상대로 제소했다. 소송은 2025 회계연도 범죄 피해자 보조금(Crime Victims Fund)의 신규 조건—즉, 지급 대상 기관이 이민세관단속국(ICE)과의 협조를 약속해야만 보조금을 받게 하려는 방침—에 대한 위헌성을 다투고 있다. 이번 이메일은 향후 보조금이 아닌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이미 배정된 예산에도 일괄 적용되면서 파장이 더 커졌다.
‘소급 적용 가능성’에 대해, 워싱턴 D.C.의 저명한 형사·헌법 변호사 애비 로웰(Abbe Lowell)은 로이터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회가 승인했거나 계약으로 체결된 보조금의 조건을, 당사자 동의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소급 변경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로웰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새로 붙여 집행하려 한다면, 이는 법정에서 충분히 쟁송(爭訟) 대상이 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지원 단체 ‘혼란·위축 불가피’
피해자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현장 단체들은 즉각적인 ‘서비스 공백’을 우려한다. 제인 도우 연합(Jane Doe Inc.)의 대표 헤마 사랑-시에민스키(Hema Sarang-Sieminski)는 “이미 범죄 신고를 주저하는 이주민 피해자들에게 추방 위험을 다시 상기시키는 조치가 될 것”이라며 “신고율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주민 생존자 연합(Alliance for Immigrant Survivors)이 2025년 6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76%가 ‘이주민 피해자들이 경찰 신고를 꺼린다’고 전했다. 사랑-시에민스키 대표는 “DOJ가 이미 사용된 자금을 환수(claw back)할 가능성, 변호사 윤리 딜레마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인신매매 피해 지원단체도 직격탄
프리덤 네트워크 USA(Freedom Network USA)의 진 브러그먼(Jean Bruggeman) 대표는 “피해자가 가해자(인신매매범)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하거나, 형사 재판 절차를 따라가도록 돕는 데 막대한 제약이 생긴다”고 우려했다. 그는 “공고문(solicitation)에 명시된 조건이 계약의 전부인데, 이렇게 뒤늦게 바뀌면 법적 소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행정부 2기’ 규제 드라이브 계속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바이든 행정부 시절 보조금을 겨냥한 두 번째 대규모 조치다. 법무부는 2025년 4월에도 “우선순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 811백만 달러(약 1조 1,170억 원) 규모의 365개 보조금을 일괄 취소한 바 있다.
용어 설명
• Removable Alien – 미 국토안보부가 ‘추방 대상’으로 분류한 외국인을 의미한다.
• VOCA(Victims of Crime Act) Assistance Program – 연방 정부가 범죄자에게 부과한 벌금‧합의금을 기반으로, 피해자에게 법률·의료·심리 지원을 제공하는 기금이다.
• Claw Back – 정부나 기관이 이미 지출된 보조금을 회수하는 절차를 말한다.
전문가 시각 및 전망
법조계는 이번 조치가 연방지원금의 지출 재량과 주(州) 권한을 둘러싼 헌법적 충돌로 번질 가능성을 주목한다. 현행 ‘연방보조금 규정(2 C.F.R. Part 200)’과 행정절차법(APA)은 예고 기간 및 의견수렴 절차를 요구하지만, 이번 지침은 사전 공청회 없이 즉시 시행됐다. 이에 따라 주정부·비영리단체가 제기할 가처분·본안 소송에서 존속 여부가 판가름 날 전망이다.
또한, 다수의 피해자 지원 단체는 ‘피해자 자격’과 ‘불법 체류 여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운영 원칙을 가진다. 이 때문에 이민 신분 확인 절차를 새로 도입할 경우, 비용 증가와 2차 피해 가능성이 제기된다. 궁극적으로는 범죄 신고율 감소, 공공안전 악화라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향후 연방법원이 ‘소급 제한’의 위헌성을 인정할 경우, 보조금 재집행이나 추가 예산 배정이 필요해질 수 있다. 반대로 법무부 승소 시, 주정부·비영리기관은 자체 재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서비스 축소를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결론
이번 법무부 지침은 이주민 피해자 보호 체계와 연방·주정부 관계에 중대한 변곡점을 예고한다. 소송 결과가 향후 수년간 미국 내 이민정책·범죄피해 지원정책 전반을 좌우할 가능성이 커, 법조계·정계·시민사회가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