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연금제도 개편이 유럽 장기 국채 시장의 큰손을 잃게 만들다

네덜란드 연금제도 전환으로 유럽 국채 시장의 수급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장기 국채의 대표적 매수 주체였던 네덜란드 사설 연금펀드들이 포트폴리오 재편에 착수하면서, 국가 재정을 책임지는 유럽 각국 재무장관들은 또 하나의 걱정거리를 떠안게 됐다.

2025년 8월 7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민간 연금부문은 2024년부터 확정급여(DB)를 확정기여(DC) 방식으로 전면 전환한다. 1조7,000억 유로(약 2조 달러)를 운용하는 이 부문은 유로존 최대 규모다. 제도 변경으로 연금펀드는 더 이상 참가자에게 장기 확정 수익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 국채를 매수해 금리 변동 위험을 헤지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이는 유로존 10조 달러 규모의 국채 시장에서 장기물의 구조적 수요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특히 독일이 사상 최대 수준으로 차입 규모를 세 배로 늘리려는 시점이라 부담이 가중된다.


장기물 매수 세력이 증발하다

Kal El-Wahab 뱅크오브아메리카(BoA) EMEA 선형금리 거래 총괄은 “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듀레이션(만기) 매수자가 사실상 사라지는 패러다임 전환

“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올해 들어 네덜란드 연금펀드는 전혀 매수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기물 매수 부재는 이미 금리곡선의 스티프닝(steepening)을 자극하고 있다. 대표 차입국 독일이 30년물 국채에 대해 지불하는 금리는 단기물 대비 프리미엄이 확대 중이다. 이에 대해 크레디 아그리콜 CIB 국채 트레이딩 총괄 브루노 벤시몰은 “시장 컨센서스는 여전히 장단기 금리차 확대“라고 설명했다.

스티프너란 장기 금리는 상승(또는 덜 하락)하고 단기 금리는 하락(또는 덜 상승)해, 장단기 금리차가 벌어지는 트레이딩 전략을 말한다. 연금펀드처럼 장기물 비중이 큰 투자자가 사라지면 장기 금리가 상대적으로 더 오를 여지가 있다.


네덜란드 연금펀드가 왜 중요한가?

네덜란드 사설 연금펀드는 유로존에서 가장 큰 자산 규모를 보유하며, 금리 헤지 목적의 장기 채권 매입·이자율 스와프 거래에 적극적이었다. 과거 이들이 30년물 독일 국채(Bund)를 사들이며 곡선 평탄화(flattening)에 기여해 왔다. 하지만 확정기여제에서는 투자수익률이 곧 가입자 연금액이 되므로, 더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주식·크레딧 등 위험자산 비중을 키울 수 있다.

ABN암로 금리전략가 야프 테르하위스 전 네덜란드 재무부 딜링룸 대표는 “정부가 자금조달(funding) 계획을 세울 때 연금펀드 수요 공백을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얼마나, 얼마나 빨리 팔까?

네덜란드 은행들은 연금펀드가 최대 1,000억 유로에 달하는 국채를 장기적으로 매도할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BoA의 엘와합은 “이미 보유 중인 채권의 듀레이션이 많이 짧아졌기 때문에, 꼭 장기물을 대거 매도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결국 핵심은 추가 매수 의지의 부재라는 설명이다.

가장 큰 연금기금 ABP(자산 5,200억 유로)는 2030년까지 국채 250억 유로를 축소하되, 2027년까지는 2023년 수준의 보유액을 유지하겠다는 로드맵을 내놨다. 이는 점진적 이탈을 시사한다.


헤지 해소가 스왑 곡선을 뒤흔들 전망

연금펀드들은 과거 장기 고정금리를 수취(receive)하는 이자율스왑으로 금리위험을 헤지해 왔다. 제도 전환이 본격화되면 해당 포지션을 청산하기 위해 현금을 마련해야 하며, 이는 채권 매도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애널리스트들은 스왑시장의 장·단기 금리차가 현물채권보다 더 가파르게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바클레이즈는 2026년 1월을 다음 고비로 지목했다. 상위 5개 연금펀드 중 3곳이 그 시점에 새 제도로 전환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 하나인 PMT는 12월과 1월 두 차례에 걸쳐 “마지막 전환 준비 점검“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바클레이즈 로한 칸나는 “

최종 ‘전환 또는 연기’ 결정이 전환 직전에야 나올 가능성이 높다

“며 연말 변동성 확대를 경고했다.


재정당국의 과제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국은 인플레이션·안보 비용 증가로 채권 발행액을 크게 늘릴 전망이다. 그러나 장기 투자자층이 얇아지면 금리 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차입 비용이 급등할 수 있다. 영국과 일본이 이미 단기물 위주 발행 전략으로 선회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결국 유럽 재무장관들은 공공 금융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발행 만기 다변화, 투자자 기반 확대, 재정지출 효율화 등 종합 대책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문가 시각과 향후 변수

금리곡선 스티프닝 가속 가능성: 장기물 추가 약세가 나타나면 실질금리 상승으로 경제활동과 기업 투자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스왑시장 변동성: 헤지 포지션 청산 시점이 겹칠 경우 스왑 스프레드가 확대돼 금융기관의 자본 요구치가 늘어날 수 있다.
정책 대응: 유럽중앙은행(ECB)이 장기물 매입 프로그램을 재개할지 여부가 향후 시장 균형을 좌우할 수 있다. 다만 아직 관련 논의는 공식화되지 않았다.

투자자 입장에선 듀레이션 조정과 함께, 금리 상승에 민감한 섹터·기업의 신용위험을 재평가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