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 통화정책위원이자 독일 연방은행(Bundesbank) 총재인 요아힘 나겔(Joachim Nagel)이 추가 기준금리 인하는 물가 안정이라는 중장기 목표를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25년 9월 12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ECB는 전일 통화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하며 성장·물가 전망이 양호하다는 판단을 유지했다. 나겔 총재는 같은 날 이탈리아 경제지 일 솔레 24 오레(Il Sole 24 Ore)와의 인터뷰에서 “최신 전망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ECB의 중기 목표치인 2%와 대체로 부합한다”며 동결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상황에서 추가적인 금리 인하(further rate cuts)를 단행한다면 어렵게 달성한 물가 안정이 위협받을 수 있다.” — 요아힘 나겔, 독일 연방은행 총재
나겔 총재는 독일 정부가 국방·인프라 부문에서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그는 “독일 재정지출 확대는 이미 유로존 전역에 경기 부양 효과를 주고 있다”면서, 이러한 재정 자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급한 통화완화는 정책 혼선만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CB 통화정책의 현주소
이번 결정으로 예금금리(deposit facility rate)는 현 수준인 4% 수준에서 유지됐다. ECB는 2022년 여름부터 사상 최단기간에 걸쳐 금리를 4%P 넘게 인상한 후 2024년 6월 첫 인하를 단행했으며, 이후 시장에서는 추가 인하 가능성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물가 상승률은 에너지·식품 가격 급등이 진정되며 정점을 지난 것으로 평가되지만, ECB 내부에서는 “임금·서비스 인플레가 여전히 높다”는 경계론이 건재하다. 나겔 총재의 발언은 이러한 매파적 기류를 재확인한 셈이다.
독일 재정지출이 던지는 시사점
독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방비(GDP 대비 2% 목표)를 꾸준히 확대하고, 노후 도로·철도·디지털 인프라 개선에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왔다. 나겔 총재는 이 같은 투자가 유로존 20개국 전체에 파급효과를 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재정·통화 동시부양은 수요 과열과 물가 재상승 위험을 키울 수 있다”며, 정책 조율(policy mix)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ECB 내부의 전통적 기조인 ‘물가 안정 최우선’ 원칙과도 궤를 같이한다.
전문가 해설: 왜 추가 인하가 부담인가
시장 일부에서는 성장 둔화를 이유로 금리 재인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ECB 매파 진영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첫째, 근원물가(core CPI)는 제조·에너지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임금 상승으로 목표치(2%)를 초과하고 있다.
둘째, 최근 유로화 약세가 수입 물가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셋째, 독일·프랑스 등 주요 회원국의 확장적 재정정책이 총수요를 지탱하고 있다.
넷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고금리 기조를 유지하면서 달러 강세가 지속되고, 유럽이 지나치게 완화로 선회하면 자본유출 압력이 커질 수 있다.
결국 ECB는 ‘조기 완화 vs. 물가 재가속’이라는 트레이드오프 앞에서 신중한 태도를 택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용어 설명
• 중기 목표치medium-term objective :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평가할 때 단기 변동성을 배제하기 위해 통상 2~3년 앞을 바라보고 설정하는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의미한다.
• 예금금리deposit facility rate : 시중은행이 하루 동안 ECB에 예치할 때 적용받는 금리로, 유로존 단기 시장금리의 하단 역할을 한다.
• 매파/비둘기파 : 통화 긴축에 우호적인 인사를 ‘매파(hawk)’, 완화에 우호적인 인사를 ‘비둘기(dove)’라고 부른다.
취재진 관찰 및 전망
취재 현장 분위기를 종합하면, ECB 위원 상당수는 ‘데이터에 기반한 결정’을 강조하며 “빠르면 연말까지 경제·물가 흐름을 좀 더 지켜볼 것”이라는 공통된 메시지를 보냈다. 반면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2026년 초까지 최소 두 차례 인하를 기대하고 있어, 정책과 시장 간 온도 차가 뚜렷하다.
기자가 만난 복수의 유럽계 채권운용사 책임자들은 “GDP 성장률 추세가 1%대에 머물면 ECB도 결국 완화를 재개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서비스 인플레가 잡히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관망 모드’가 길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결국 관건은 임금 협상 시즌과 에너지 가격이다. 겨울철 난방 수요가 높아지고, 산유국 감산이 지속될 경우 인플레 재상승 우려가 확산될 수 있다. 반대로 세계 경기 둔화와 재고 조정이 겹치면 물가 압력이 더 빠르게 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자 코멘트
나겔 총재의 발언은 ECB가 “물가 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그의 경고는 금융시장의 “빨리, 많이”라는 기대를 진정시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다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유럽 제조업 관계자들은 고금리 장기화로 투자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통화 긴축의 ‘지연 효과’(lag effect)가 현실화될 경우 ECB가 향후 데이터 변화를 얼마나 민첩하게 반영할지 주목된다.
결론적으로, ECB가 금리 동결 기조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느냐는 독일 재정지출과 유럽 내 임금 압력, 그리고 글로벌 에너지·환율 환경이 함께 교차하는 복합 방정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