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전통적 이미지였던 ‘저축 모범생’이 흔들리고 있다. 생활비 급등과 경험·자기관리 소비 확대가 장기 재무설계보다 우선순위로 떠오르면서, 더 많은 근로자들이 사실상 ‘월급으로만 연명(paycheck-to-paycheck)’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2025년 8월 14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글로벌 급여 서비스 기업 ADP의 최신 연구 결과에서 싱가포르 근로자의 60%가 2024년 ‘월급날 직후 통장 잔액이 0원에 근접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평균 48%는 물론 중국·한국·일본·인도네시아 등 역내 주요국보다도 높은 수치다.
ADP는 34개 시장 3만 8,000여 명을 조사했으며, 이번에 처음으로 해당 ‘급여 의존’ 지표를 도입했다. 비슷한 흐름은 다른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포레스터 리서치가 2021년 실시한 설문에서는 같은 지표가 53%였는데, 불과 3년 만에 7%p가 추가로 상승했다.
“저축해야 하는 건 알지만, 삶도 누려야 한다”
디지털 뱅크 서비스 회사에 다니는 31세 싱가포르인 조반 여오(Jovan Yeo)는 “월급이 들어오면 신용카드 대금·부모님 용돈·보험·투자를 지불하고 나면 잔액이 0이 된다”면서 “남는 돈은 여행·외식·피트니스 비용으로 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I can save if I don’t go out, but I want to have a life and experience life too!
”라고 CNBC에 말했다.
메이뱅크 리서치의 경제학자 브라이언 리는 “물가상승률이 최근 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왔지만, 구조적 요인—고가의 주택·수입 의존도—으로 인해 싱가포르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생활비를 기록한다”고 지적했다.
Numbeo의 2025년 중간 집계에 따르면 싱가포르 생활비 지수(Cost of Living Index)는 85.3으로 전 세계 5위, 아시아 1위를 차지했다. 1년 새 11% 급등한 수치다.
실제 물가 상승이 임금 상승 속도를 앞질렀다. 메이뱅크 자료에 따르면 2019~2024년 실질 중위소득은 연평균 0.4% 감소해, 2014~2019년 연 2.2% 증가와 대비된다. 2024년 반등했지만 2025년에는 관세·무역 둔화로 완화될 전망이다.
주택·교통비가 만든 ‘고정비 함정’
주택 가격은 압력을 가중한다. 싱가포르 HDB(주택개발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80%가 거주하는 공공아파트 재판매 가격은 2024년 9.6% 급등했다. 2023년 4.9% 상승보다 두 배 가까이 빨라진 속도다.
자동차 역시 사치재에 가깝다. COE(Certificate of Entitlement) 제도로 인해 차량 구매 전 ‘도로 이용 권리’를 경매로 따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COE 가격은 10만 싱가포르달러를 넘어 차량 본체 가격과 맞먹거나 웃돈다.
여기에 BNPL(Buy Now Pay Later) 서비스까지 확장되면서 ‘미래 소득’까지 소비하는 문화가 확산됐다. 싱가포르 중앙은행(MAS) 자료에 따르면 BNPL 거래액은 2020년 대비 2021년에 약 4배로 늘어난 SG$4억 4,000만을 기록했다.
전문가 진단 · 세대 간 인식 차이
필립캐피탈 자산관리사 조슈아 림은 “럭셔리 지향 소비가 팽배해 ‘이미 받지 않은 돈’까지 쓴다”며, 자신의 고객 중 60~70%가 중산층이지만 월급 의존 생활을 한다고 전했다. 고소득층은 20%, 저소득층은 10%였다.
개인금융 교육 블로그 ‘더 워크 샐러리맨’ 공동설립자 허 루이밍은 “디지털 세대는 마케팅 노출과 비교 문화 속에서 자라 소비 충동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34세 싱가포르인 조이스 앙은 “아직 미혼이기에 주택 걱정이 없고, 아이 계획도 없어서 옛 세대만큼 절박하지 않다”고 말했다.
“저축이 어렵진 않지만, 지금 당장 꼭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 조이스 앙(월 실수령 SG$3,800)
▶ 용어 풀이*초심자용
COE(Certificate of Entitlement)는 차량 소유권을 10년간 보장하는 도로 혼잡 억제용 퍼밋으로, 정부 경매방식을 통해 가격이 결정된다.
CPF(Central Provident Fund)는 싱가포르의 국민연금·주택·의료 통합 적립제도로, 55세 전은 인출이 제한된다.
BNPL(Buy Now Pay Later)는 무이자 또는 소액 수수료로 물건을 먼저 받고 나중에 분할 상환하는 결제 방식이다.
기자 관전평
싱가포르의 사례는 ‘고물가·고소득 사회’가 반드시 고저축을 담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물가 안정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뤄졌음에도 생활비 지수는 오히려 2자릿수 상승률을 유지하고 있다. 구조적 비용—주택·교통·수입 식료—이 억제되지 않는 한, 실질임금 상승만으로는 가처분소득 개선이 제한적일 전망이다. 제도적 안전망(CPF)·고용 안정성이 심리적 ‘저축 긴장감’을 완화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는다.
결국 싱가포르 정부와 기업은 구조적 비용 절감·재정 교육 강화·정책적 소비 억제라는 세 갈래 해법을 동시에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