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발(로이터) – 월가 최고 규제기관 수장이 유럽연합(EU)의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 의무 법안 두 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 금융 규제 기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줬다.
2025년 9월 10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폴 앳킨스(Paul Atkins)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은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행사에서 연설하며 “유럽이 처방적 규제를 통해 기업과 투자자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법은 미국 기업에도 직접 적용돼 결과적으로 미국 투자자·소비자에게 비용이 전가될 수 있다”며, 유럽 당국이 자유시장 촉진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경제적 성공이나 주주 이익과 무관한 목표를 밀어붙이기보다는, 보고 의무 자체를 합리적으로 줄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 – 폴 앳킨스 SEC 위원장
ESG·지속가능성 공시 규제란 무엇인가
ESG는 기업의 Environment(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를 평가하는 지표다. 투자자가 재무 정보 너머의 비재무 리스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돕지만, 정보 수집·검증·보고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U는 2024년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 CSDDD)’을 채택해 매출·직원 수가 일정 기준 이상인 대기업이 공급망 강제 노동·환경 훼손 여부를 확인하고 시정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나 일부 회원국 반발로 최종안은 완화된 형태로 통과됐다.
이어 2025년 2월, EU 집행위원회는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 하위 기준을 완화하는 개정안을 제안했다. 이 지침은 투자자·소비자에게 제공할 환경·사회 영향 공시를 요구한다.
미·EU 규제 철학의 충돌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규제 완화를 기치로 금융감독 체계를 조정해 왔다. 앳킨스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시장 중심·자율 규제’ 노선이 여전히 SEC 수장 입을 통해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그는 “유럽 규제 일부가 상당히 개선됐으나 추가 개정이 필요하다”며, 특히 공시 의무에 수반되는 행정 비용을 문제 삼았다. 예컨대 글로벌 공급망을 가진 미국 대기업이 EU 시장에서 활동하려면, 유럽 지침에 맞춰 별도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 이중 규제 문제가 발생한다는 논리다.
SEC 내부에서도 ESG 공시 기준을 마련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비용·효과 대비 논쟁으로 지연 중이다. 이번 발언은 당분간 ‘의무화’보다 ‘자율 공시’ 방식을 선호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전문가 시각과 향후 전망
국내 ESG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미·EU 공시 규제 간 괴리가 커질수록 한국 수출기업은 이중 표준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유럽 고객사 납품을 위해선 EU 규정을 따르되, 미국 투자자를 상대할 때는 자발적 공시 체계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금융법학 교수는 “SEC 수장이 OECD 무대에서 공개 비판한 것은 드문 일”이라며 “향후 트랜스애틀랜틱(미·EU) 규제 조율이 주요 외교·통상 의제로 부상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재까지 EU는 2026 회계연도부터 단계적으로 CSDDD·CSRD를 적용할 계획이다. 만약 미국 기업이 이를 회피할 경우, 벌금·시장 접근 제한이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투자자가 지켜볼 사안이다.
필자 의견* ① EU가 ‘완화안’을 내놓았지만 규제 프레임 자체는 유지돼 중장기적으로 보고 의무 범위가 다시 확대될 수 있다. ② 미국이 자유주의 노선을 고수하면, 복수의 규제 체계가 병존하는 ‘규제 모자이크’가 고착될 수 있는데, 이는 비용 절감보다 투명성 강화를 우선시하는 기관투자자와 충돌을 낳을 수 있다.
한국 투자자 입장에서는 미국·유럽 ETF 편입 종목의 ESG 리스크를 면밀히 살펴야 하며, 특히 공급망 인권 리스크가 부각될 업종(섬유·전자·자동차 등)에 주의가 필요하다.
※ ESG, CSDDD, CSRD 등 전문 용어는 EU 공식 자료 및 로이터 원문 표기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