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트럼프 한마디, 90년 관행이 흔들리다
2025년 9월 15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 ‘트루스 소셜’에 짤막한 글을 올렸다. 요지는 간단했다. “기업들이 분기(Quarterly)가 아닌 6개월(Semi-Annual)마다 재무보고를 하면 어떻겠는가? 비용은 줄고, 경영진은 장기 전략에 집중할 수 있다.” 1934년 증권거래법 제정 이후 90여 년 간 미국 자본시장의 ‘생활 리듬’이었던 분기보고 제도를 사실상 뒤집자는 제안이 나온 순간이다.
월가 트레이더들은 첨단 단축키로 글을 캡처해 단체 채팅방에 공유했고, 회계법인 파트너들은 고객사에 보낼 긴급 브리핑을 준비했다. ‘분기 실적-가이던스-어닝 서프라이즈’로 이어지는 미 증시의 전형적 드라마가 ‘한 시즌 건너뛰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전대미문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된 탓이다.
■ 1. 제도 연혁과 국제 비교
1) 미국 SEC 10-Q 보고 의무
· 1934 증권거래법 Rule 13a-13 도입
· 1970년대 전면 전산화, 2002년 SOX법으로 내부통제 강화
· 현재 ‘Large Accelerated Filer’ 기준: 분기 종료 후 40일 내 10-Q 제출, 연차 10-K는 60일 내 제출
2) 해외 규정
영국·EU ― 반기(Interim) 보고만 의무, 분기 실적은 선택
일본 ― 일본판 SOX(J-SOX) 도입 이후 분기 ‘쇼호쿠(四半期)’ 공시, 단 IFRS 채택 기업은 반기 통합 허용
한국 ― 2001년 이후 전면 분기보고, K-IFRS 연결·단독 병행
즉 “미국만 유독 짧은 보고 주기를 고집한다”는 주장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S&P500 시가총액이 전 세계 증시의 40%를 차지한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미국 제도의 변화는 ‘글로벌 표준’의 자동 교정 효과를 유발할 파괴력을 갖는다.
■ 2. 장기적 파장 ― 5대 구조적 축
① 시장 투명성 vs. 정보 공백 리스크
분기보고는 실시간 가격발견(price discovery) 정확도를 높여 왔다. 반면 보고 간격이 180일로 늘어나면 주가 변동성(volatility)이 이벤트 드리븐 형태로 높은 첨두성(kurtosis)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사설 데이터·대체 데이터(위성 · 신용카드 리포트 등)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질 것이며, 이는 기관투자자와 개인 간 ‘정보 빈칸(information gap)’을 확대할 수 있다.
② 단기주의(Short-termism) 완화 효과
MIT 슬론경영대학원 20년 간 연구에 따르면 분기 EPS 가이던스를 제공하지 않는 기업의 R&D 투자 비중이 동종업계 대비 1.7%p 높다. 보고 주기 완화가 CAPEX·인재 확보 등 장기 프로젝트에 긍정적이라는 근거다. 특히 AI 파운드리, SMR(소형모듈원자로), 우주 인터넷 등 ‘J-Curve형 캐시플로’ 사업군이 수혜권에 들어간다.
③ 애널리스트 ‧ 자본시장 인프라 구조조정
현재 월가 브로커리지 모델은 ‘분기실적 직전 → 컨센서스 업데이트 → 포스트 어닝 코멘터리’로 수익 곡선을 극대화한다. 반기 전환 시 커버리지 마진 감소가 불가피하며, 리서치 자동화(LLM 기반 초개인화 리포트)의 상용화가 가속될 전망이다.
④ ESG·비재무 공시 패러다임 변동
SEC는 2026년부터 기후리스크 Scope 3 배출 의무 공시를 추진 중이다. 반기보고 체제로 이행할 경우 ESG 데이터는 분기 단위로 자발적 공개(Voluntary Disclosure)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지속가능성 지수 펀드의 편입 룰을 재정의할 촉매로 작용한다.
⑤ 파생상품·옵션 시장의 ‘결제 달력’ 재편
S&P500 옵션의 90% 이상이 실적 시즌 앞뒤 Gamma Scalp 전략에 활용된다. 결제주기가 6개월 단위로 늘어나면 월물 Open Interest 분포가 완전히 달라지고, 시장조성자(MM)들은 위험 중립 Delta 헤지 모델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 3. 이해관계자별 득실 분석
스테이크홀더 | 주요 득(+) 요인 | 주요 실(–) 요인 |
---|---|---|
대형 상장사 (시총 > 100억달러) |
· IR · 회계 비용 절감 · 장기전략 투자 여력 확대 |
· 대형 사건 발생 시 손해배상 소송 폭증 · 사이언트픽·퀀트 펀드의 대체데이터 추적 강화 |
중소형 상장사 | · 보고비용 절감 체감이 가장 큼 · 내부 통제 인력 부담 완화 |
· 유동성 위축 → 자본조달 C/P 상승 · 애널리스트 커버리지 축소 우려 |
장기기관(연기금·운용사) | · 단기 변동성 감소 시 알파 포착 용이 | · 정보 비대칭 심화 → 모니터링 비용 증가 |
개인투자자 | · 패시브 전략의 상대적 매력 확대 | · 실시간 Fundamental 정보 접근성 저하 |
■ 4. 정책 시나리오: 4분면 매트릭스
- 전면 반기보고(Full Semi-Annual) ― 10-Q 폐지, 10-K 외 연차·반기만
- 하이브리드 보고(Hybrid) ― 재무제표는 반기, KPI·가이던스는 월별 자율 공시
- 자발적 선택제(Opt-In) ― 시총 5억달러 미만 기업만 반기보고 선택
- 현행 유지(Status Quo) ― GAAP 기반 10-Q 지속
현재 트럼프 캠프 내부 초안은 ‘옵션 2’ 하이브리드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 5. 회계·감사 업계의 대응 전략
- AI Continuous Audit 플랫폼 — 실시간 ERP 데이터 연동, Materiality Threshold 알고리즘 적용
- Non-GAAP 지표 표준화 — EBITDA 변형, ARR, CAC 등 KPI 정의를 SEC Regulation G 수준으로 상향
- XBRL 태그 고도화 — 반기·연차 간 데이터 그레인 손실 최소화
■ 6. 글로벌 자본유치 경쟁과 ‘런던·싱가포르의 미소’
런던증권거래소(LSE)는 “미국발 보고주기 완화는 해외 2차 상장(Secondary Listing) 기업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며 일찍부터 환영 메시지를 냈다. 특히 핀테크·바이오 유니콘들이 런던 또는 싱가포르에서 디포짓리 리시트(DR) 발행 후 뉴욕 IPO를 병행하는 양다리 전략을 채택할 경우, EU 자본시장연합(CMU) 추진에도 호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 7. 결론 및 정책 제언
분기보고→반기보고 전환 논의는 ‘단기주의 해소’라는 명분과 ‘투명성 훼손’이라는 우려가 교차하는 고난도 정책 과제다. 실효적 개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축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 데이터 대체성 확보 — 연속성 높은 KPI · ESG · 리스크 공시 템플릿을 마련해 정보 공백 최소화
- 규모·산업별 차등 적용 — 소형·R&D 집약 기업에 우선 선택권 부여 후 3년 평가
- 글로벌 규제 컨버전스 — IFRS 재무공시 주기 통합, IOSCO 모범사례 가이드라인 제정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보고 빈도’가 아니라 ‘보고 품질’이다. 분기보고 폐지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투명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잡는 ‘스마트 리포팅’ 체계가 자리 잡을 때, 미 자본시장은 한 단계 더 성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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